슈만과 클라라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이며, 결국 어디로 가는가? 예술에서는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 클래식 음악에서도 예외 없이 해당되며,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에는 신에 대한 물음과 인간의 탄생과 죽음으로 표현되었으며, 왜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에는 ‘사랑’이란 주제로 그려졌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랑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가장 열광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이며, 특히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 불행해 질 것이 뻔한 운명임을 알면서도 마법처럼 이끌려갈 수밖에 없는 사랑을 우리는 기억한다.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힘겨웠던 사랑과 몇 개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클라라 슈만(Clara Shumann·1819∼1896)’은 행복하게 태어난 여인이었다. 그녀는 당시 최고의 피아노 교수를 아버지로 두었으며 자신도 천재적인 피아노연주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1785∼1873)’는 딸 클라라의 천재성을 미리 알아보고 어린 나이의 클라라를 음악계에 화려하게 데뷔시켰던, 지난 회에 언급했던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유사한 자식에 대한 기대가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한 청년을 만난다. 바로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1810∼1856)’이다. 클라라의 아버지였던 비크 교수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으며 재능이 뛰어났지만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무리한 연습을 하다 손가락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슈만의 교양과 지성은 문학과 음악방면에서는 당대 최고였으며 쇼팽과 브람스를 음악계에 소개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등 인격도 넉넉한 사람이었으나 후에 우울증을 앓는 등 정신적으로 온전치 않았으며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피아니스트로서의 장래도 비관적이었다.

비크 교수는 이들의 비극적인 미래를 예측했던 것일까? 1835년 둘은 사랑을 확인한 뒤에 비크 교수의 결혼 반대로 소송까지 휘말렸고 아버지였던 비크는 이들을 떼어 놓고자 4년 동안 클라라를 유학 보냈지만 결국 1840년 결혼에 성공했다. 슈만의 작품 중 뛰어난 걸작들이 결혼한 직후 많이 작곡되었다. 그래서 1840년을 슈만에게 있어서 ‘가곡의 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가곡집 ‘리더스크라이스’‘시인의 사랑’‘여인의 사랑과 생애’등 많은 명 가곡들이 있지만 특히 슈만이 결혼 선물로 클라라를 위해 작곡한 연가곡집 ‘미르테의 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연가곡 ‘미르테의 꽃’은 유명한 시인 26명의 시로 구성된 가곡집인데 그 중 뤼케르트의 시로 작곡된 ‘헌정(Widmung)’이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클라라에 대한 슈만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가사는 매우 아름다우며 요즘 결혼식장에서 축가로 써도 만족할 만하다. 가사 일부를 소개하자면,

당신은 나의 휴식/당신은 마음의 평화/당신은 나에게 주어진 하늘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나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당신의 시선은 나를 환하게 합니다/당신은 나를 사랑스럽게 존중합니다.
나의 선한 영혼을/보다 나은 나를

젊은 시절의 브람스.
젊은 시절의 브람스.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며 선율도 독일 가곡 특유의 함축성을 가지며 화려하진 않지만 내면의 사랑을 표현하기에 손색이 없다. 후에 리스트는 이곡을 피아노 독주곡 버전으로 편곡하여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곡은 성악가와 피아니스트에게 모두 사랑받는 곡이 되었다.

슈만이 태어나고 살던 시기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과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진보와 보수가 격렬히 대립하던 시기였으며 자유주의가 보급되어 시민계급의 자기 권리의 주장으로 나타나던 시기였다. 그 영향으로 나타난 것이 국민주의와 개인주의였는데, 국민주의는 자국어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일깨우는 예술작품을 선호했으며 개인주의는 예술가의 주관적인 개성과 경험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슈만의 예술가곡 뿐만이 아니라 당시 독일에서 작곡되었던 슈베르트의 작품을 비롯한 수많은 독일어 가곡들은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성악곡뿐만 아니라 슈만은 기악곡에서도 걸작이 많이 있지만 필자는 결혼한 2년 후인 1842년에 작곡된 ‘피아노 4중주op.47’의 2악장을 권하고 싶다. 슈만의 ‘안단테 칸타빌레(Andante catabile)’라고도 부르는 이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4중주 안단테 칸타빌레에도 뒤지지 않으며 슈만의 작품 중 최고의 선율이라고 평가된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은 심정에 처했을 때 이 곡을 듣는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들이 결혼한 지 14년이 지난 1854년 운명은 비극이라는 날카로운 창을 이들에게 던진다.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지는 자살 시도를 한 것이다. 결국 자살은 실패로 끝났지만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갔다고 한다. 암세포는 젊은 신체를 가진 사람에게 더 빨리 전이된다고 한다. 슈만이 숭고하고 높은 교양을 지녔기에 그의 정신에 있던 어두운 그림자가 더 빨리 그를 잠식해 버린 것일까?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클라라를 슈만의 아내, 브람스의 정신적 연인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다. 당시 시내의 선술집에 가면 리스트와 클라라 슈만을 놓고서 누가 더 우월한 연주자인지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독일의 통화권이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 독일의 마르크 화폐에 클라라의 초상이 그려진 것을 봐도 클라라의 명성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클라라의 남편이었던 슈만은 작곡자이자 평론가, 저술가로 입지가 있었지만 클라라가 연주 여행을 할 때는 매니저의 역할을 하며 동행하곤 하였다. 연주하는 클라라의 모습을 보며 젊은 시절, 원래 자신의 꿈이었던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한 부분에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슈만은 음악작품 외에도 브람스와 쇼팽이라는 음악가를 소개하여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특히 브람스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해 준 슈만에 대한 존경이 열렬하여 슈만이 1854년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난 뒤 클라라와 함께 슈만을 돕기 위한 연주회를 개최하여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슈만이 3년 뒤 세상을 떠난 뒤에도 클라라와 그 가정의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경제적, 음악적으로 도움을 준다. 이 후 클라라와 함께 슈만의 작품을 연주하고 알리는 역할을 함으로서 슈만을 대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공헌이 있다.

세상은 슈만이 떠난 후 브람스와 클라라와의 관계를 의심하곤 한다. 브람스가 별 이유도 없이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신으로 지낸 것이 의아하긴 하지만, 드라마적인 상상력에 브람스의 작품까지 창의적으로 엮어 다양한 상상을 하곤 한다. 대표적인 예로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클라라가 한 번도 남편을 방문하지 않은 것을 예로 들며, 이때 이미 슈만에게서 클라라의 마음이 떠났다고들 말한다. 필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무너져 가고 있는 슈만을 클라라는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열렬히 사랑하고 존경하였던 시절의 슈만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을 것이다.

클라라 슈만의 얼굴이 그려진 독일 마르크 지폐.
클라라 슈만의 얼굴이 그려진 독일 마르크 지폐.

브람스와 클라라는 음악의 동료이자, 슈만 작품의 알림이 역할을 충실히 하였을 뿐 둘의 관계는 아무 일도 없었다. 클라라는 40년을 더 살고 1896년 슈만의 곁으로 간다. 그리고 브람스는 그 이듬해에 눈을 감는다.

클라라에게는 슈만과 함께 했던 시간보다 브람스와 함께한 시간이 더 많았던 셈이다. 글의 서두에 클라라는 행복하게 태어난 여인이라고 시작했었는데 어쩌면 슈만, 브람스와 같이 인생의 절반을 나누어 함께한 클라라는 음악적으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간 가장 행복한 여인이라 할 수도 있겠다. 슈만은 영혼의 자유를 갈망하는 낭만주의 음악을 실천한 인물이었으며 한 여인과 음악과 문학을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사람이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Frei Aber Einsam(자유로우나 고독하다)’ 자유와 이성의 경계에서 음악에게 물음을 던진 외로운 지성이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