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100년은 긴 세월이다. 1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민초(民草)들은 100년 후인 2019년을 상상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1819년 순조 19년을 살았던 조선의 백성들이 100년 후인 1919년을 상정하기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하되 21세기 19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2119년을 가늠하려 한다. 시공간의 무한축소와 과학기술문명이 호모사피엔스에게 부여한 선물 덕분이다. 100년 뒤 세상은, 인류는, 지구는, 우주는 어떤 양상일 것인가?!

어릴 적 3월이 되면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로 시작하는 <유관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만 열일곱 살이 되기 전에 운동에 참여하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부르짖었던 열혈 선구자 유관순. 이화학당 2년생으로 운동에 참가하고,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유관순. 그녀는 100년 뒤 우리나라와 한민족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까?!

이른바 33인의 민족 지사들이 하나둘 변절하여 일제 앞잡이로 전락해갔던 것과 대조적으로 순국의 길을 걸었던 유관순.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잔악한 고문에도 끝내 굴하지 않았던 시대의 등불 유관순. 죽어가면서 그이는 조선의 푸르른 하늘을 그리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해방된 조국의 장려(壯麗)한 모습이었을까, 민족 전체가 하나 되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100년 뒤의 2019년 모습이었을까?!

그이가 살아생전 헤아릴 수 없었던 100년 세월 한반도에는 너무도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3·1운동 100주년에 각별하게 떠오르는 것은 친일부역자 무리의 색출과 처벌에 실패했다는 뼈아픈 현실이다. 반민특위의 와해(瓦解)로 무산된 반민족행위자 척결은 지금까지도 짙은 암운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친일부역 매국노들이 반공 투사로 탈바꿈하면서 이 나라 민초들과 독립 운동가들은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하는 말로 유명한 약산 김원봉은 3·1운동의 영향으로 1919년 12월 항일무장투쟁의 선두였던 ‘의열단’을 조직한다. 일제가 320억원의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 했던 신출귀몰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다. 그러나 해방 후에 약산은 친일부역 악질매국노 노덕술에게 갖은 고문과 치욕을 경험한다. 독립 운동가를 반공의 이름으로 고문하고 승승장구했던 반공 투사들!

이런 일은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반공 투사들은 훗날 민주화운동에 매진했던 숱한 지식인과 청년들을 투옥·고문하고 죽음으로 몰고 갔다. ‘빨갱이 사냥꾼’이 된 것이다. 그것의 정점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분연히 일어선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 죽음의 질곡으로 몰아갔던 사냥꾼들과 그 후예가 제1야당의 간판 아래 버젓이 활개치고 있다.

열여덟 나이에 세상을 버린 유관순 열사는 이런 정황을 알고 있을까.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혁명가이자 전설적인 항일전사 김원봉은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깨달았을까?! 그가 꿈꾸었던 민족해방과 조국의 본령이 쥐새끼나 다름없는 친일 매국노와 그 후예에게 처절하게 짓밟힐 것을! 그자들을 대한민국의 역사와 민족의 이름으로 영원히 추방하여 다가올 새로운 100년의 미래를 그리는 작업이 절실하리라.

과거를 돌이킴은 지난날의 과오(過誤)를 성찰하고, 다가올 날들의 기획에 필수적이다.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자들의 무리가 역사를, 열사를, 투사를, 민주화 운동가를 다시는 모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최소과제일 것이다. 그것은 100년 뒤를 생각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시대적 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