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조선 후기의 우국지사이며 학자인 황현(1855~1910) 선생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지 500년이나 됐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이 또한 슬프지 않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9월 음독 순국해 대한제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이듬해 영·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매천집’이 출간되고 한말 풍운의 역사를 담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총서 제1권으로 발간돼 한국 최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의 근간이 되고 있다. 황현 선생의 저서 매천집에 ‘혈죽명(血竹銘)이 실려 있다. 혈죽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1905년 11월 17일 무장한 일본군의 포위 속에 이토의 위협과 회유에 오적(五賊)의 찬성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게재되자 성난 민심은 울분으로 요동쳤다. 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민영환도 대궐 앞에 엎드려 조약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모두 허사였다. 11월 30일 어둠이 짙게 드리운 새벽녘 종로 전동(典洞)의 한 집에 민영환이 불을 밝힌 채 앉아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명함(名銜)을 꺼내 들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비장함이 배어 있는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글을 마친 민영환은 단도(短刀)를 집어 들고 주저 없이 할복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자신의 목을 수차례 난자했다. 숨이 멎고도 한동안 피가 솟구쳐 옷을 적셨다. 한참 뒤에 급보를 듣고 시종무관 어담(魚潭)이 달려왔을 때까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원망하듯, 노한 듯, 부릅뜬 양쪽 눈은 처절하고도 가여웠고 참으로 장절한 죽음이었다.’고 어담은 당시를 회상했다. 고위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망국의 엄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마침내 속죄하는 심정으로 결연한 의지를 자결로 표했다. 12월 1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보도되자 추모객들이 구름처럼 몰렸고 비탄의 통곡이 전국으로 퍼졌다. 뒤이어 조병세, 송병선을 비롯해 수많은 우국지사와 인력거꾼 등 일반인들도 연쇄 자결을 통한 국권회복과 항일의지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민충정공이 순절하고 8개월 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순절할 당시 선혈이 낭자했던 옷과 단도를 침실 뒤에 보관해 뒀는데, 바로 그 마룻바닥 틈을 뚫고 녹죽(綠竹)이 네 줄기가 솟아났다. ‘죽어도 죽지 않으리라(死而不死)’던 그의 유서처럼 대나무로 부활한 것이다. 실상이 알려지자 고종황제도 직접 대나무를 보고 나서 ‘이 대죽은 민충정공의 충렬’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신채호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7월 7일자 황성신문 논설에서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 명하면서 전국에 혈죽 신드롬이 일어났다.

매천 황현이 쓴 ‘혈죽명’도 당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쓰여졌으리라. 내용을 보면 ‘충정을 남김없이 다 쏟은 뒤에/몸을 던져 하늘로 돌아갔나니/하늘이 그 충성 기리는 것이/어쩌면 이렇게도 치우쳤는가/ (중략) 생전의 공의 모습 볼 수는 없고/오로지 대나무만 청청하구나./을사오적(五賊)들 이 소식 듣게 되면/날이 춥지 않아도 벌벌 떨리라./내 문을 닫아걸고 깊이 누우니/계속해서 대나무 눈에 선하네.’ 대한의 지식인으로서 망국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황현과 자신이 몸담았던 지배층이 저질렀던 통한의 과오를 죽음으로 속죄했던 충정공 민영환, 같은 시대 그들이 서 있었던 자리와 삶의 궤적은 달랐지만 목숨으로 충절을 지키고자 했던 뜻은 같았다.

지금 우리 정치판의 상황은 망국의 구한말을 떠오르게 한다. 사회 구석구석에 110년 전 오적이 현대판 오적으로 부활해 곳곳에서 활개치고 있다. 지금의 사분오열된 정치판을 향해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망국의 역사를 벌써 잊고, 너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선생의 호통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