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소설가 김별아의 경주 월성을 걷는 시간
⑦ 월성의 미스터리 - 성벽 아래 묻힌 두 구의 시신

2017년 5월 16일 2구의 인골이 출토된 월성 A지구 성벽 현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공포이기도 하고 미개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화에나 가끔 등장하는 인신공양 혹은 인신공희(human sacrifice·人身供犧) 의식은 현대인들에게는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도 않은 야만이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두고 보면 인권은 물론이거니와 합리적 이성조차 근대에 이르러 증기기관차처럼 ‘발명’된 개념이다. 수렵시대와 유목시대를 지나 농경시대까지도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페니키아에서는 몰렉 신에게, 마야에서는 우신(雨神)에게, 아즈텍에서는 태양신에게 제의를 올리며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이 야훼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해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입다는 끝내 자기의 딸을 번제로 바친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에서는 목공이 죽자 177명의 신하를 순장시켰고, 진시황이 죽자 아들 호혜는 비빈과 궁녀, 무덤을 만드는 데 동원된 장인과 기술자들까지 모두 생매장시켰다.
 

성벽 아래 출토된 의문의 ‘인골 2구’
물·흙 속에 묻어 ‘사람 기둥’ 세우는
인주 설화… 고고학적 증거로 남아

하지만 고대인들이 현대인에 비해 ‘특별히’ 잔인무도해서 생사람을 잡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인신공희는 풍작을 기원하거나, 천재지변을 당해 신의 노여움을 풀거나, 전쟁의 승리를 소원하거나(혹은 패배를 반성하거나), 통치자의 위엄을 보이거나, 죽은 자의 넋을 달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은 ‘신’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운명 앞에서 그들이 바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 목숨을 바쳤다. 그들은 다만 자신을 둘러싼 어둠 앞에서 턱없이 무력했고, 그래서 어리석은 맹목이었을 뿐이다.

2017년 5월 16일, 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 발굴현장에서 2015년 3월부터 진행 중인 정밀발굴조사의 중간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바야흐로 보물창고이자 비밀의 창고가 열린 셈이다. 그때 새롭게 밝혀지거나 최초로 확인된 수많은 출토물 중에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직전인 기저부 성토층에서 출토된 2구의 인골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과 경주문화재연구소가 공동 기획한 특별전시 도록 ‘신라 왕궁 월성’에 실린 ‘성벽 밑에 잠들어 있었던 사람들’ 사진을 들여다본다. 나란히 누운 둘의 머리는 북동쪽을 향해 있다. 한 구는 정면을 향해 팔다리를 가지런히 하여 누워있는 앙신직지(仰身直肢)의 자세이고, 다른 한 구는 몸을 약간 틀어 반대편 인골을 바라보는 자세다. 두 인골 모두 성인이고 외상(外傷)의 흔적 없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전한 형태였다고 한다.

발치에는 흙으로 만든 항아리 3개와 손잡이가 달린 컵이 놓여 있고, 머리 주변에 남은 나무껍질로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을 하니 5세기 전후에 묻힌 것으로 확인되었다. 키 166㎝의 인골은 골반과 후두돌기의 모양으로 미루어 남성임이 분명했다. 159㎝ 크기의 인골은 성별이 불분명한데, 인골의 골반에서 채취한 콜라겐으로 체질인류학 DNA 검사를 진행하면 건강상태와 질병, 식생활과 유전적 특성 등이 밝혀질 것이라고 한다.(2019년 1월 4일 확인한 바, 연구 결과 한 구는 50대 남성이고 다른 한 구는 50대 여성의 인골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월성 A지구 성벽에서 출토된 인골의 모습. 2017년 5월 16일 일반에 공개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월성 A지구 성벽에서 출토된 인골의 모습. 2017년 5월 16일 일반에 공개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라인들은 왜 성벽 아래 사람을 묻었을까? 기자들의 질문에 경주문화재연구소 박윤정 학예실장은 “별도의 매장시설이 없어 사람을 제물로 바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고, 이인숙 학예사는 “인골이 매우 가지런한 형태로 발견되어 산 사람을 묻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답했다.

다시 도록 속의 앙상한 뼈를 들여다본다. 그들은 자연사하지 않았다.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저항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그들을 죽여 월성의 기초공사가 끝나고 성벽을 쌓아올리기 직전에 시신으로 묻었다. 1500년을 뛰어넘어 해골로 발견된 신라인들은 바로 ‘인주(人柱) 설화’로만 전해오던 풍습의 고고학적 증거인 것이다.

경술 개경의 도성 사람들 사이에 유언비어가 돌았는데, 왕이 민가의 어린 아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는다는 것이었다. 집집마다 경악하여 아이를 안고 도망쳐 숨는 자들도 있었다. 악소(惡小)들은 그 틈을 타서 재빠르게 도둑질을 자행하였다.

‘고려사’ 충혜왕4년(1343)의 기사는 이른바 ‘인주(人柱) 설화’에 대한 기록이다. 인주, 말 그대로 사람을 물속이나 흙 속에 파묻어 ‘사람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거대한 토목공사인 성 쌓기, 둑 쌓기, 다리 놓기 등을 할 때 사람을 기둥으로 세우거나 주춧돌 아래 묻으면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신석기시대 산동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해대(海岱)는 동방문명이 이루어진 핵심 지역인데, 치평 교장포 유적의 건물과 성벽에 어린아이 혹은 성인을 건물의 기초를 다지는 공사의 희생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배진영.2009) 기원전 1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최초 왕조 상(은)나라는 순장을 비롯한 인신공양의 풍습이 만연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수도의 은허 궁전 토단에서 수십 구에 이르는 인신 제사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일본에서도 성과 제방과 다리를 건설하는 난공사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히토바시라(人柱)’의 풍습이 에도시대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대의 토목사업은 전쟁만큼이나 중대한 나랏일이었다. 사업의 성패가 국운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였다.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려면 우선 많은 노동력을 조달할 수 있는 집권력과 막대한 지출을 감당할 만큼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했지만, 현장에서 직접 쓰이는 측량과 토목 기술 또한 중요했다. ‘삼국시대 고고학개론1’에 실린 논문 ‘토목기술과 도성조영’(권오영)에는 ‘튼튼하고 단단한 성곽을 쌓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애쓴’ 고대인들의 분투가 고스란하다.

장비와 제반 조건이 열악한 상태에서는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위험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토질을 개량하고, 중력에 의해 흘러내리는 돌과 흙을 최소화하는 각을 찾고, 경사 진 지형을 이용하거나 주변에서 흙을 캐와 덩어리를 쌓는다. 이때 식물의 잎과 줄기 등을 층층이 까는 부엽공법으로 미끄러움을 줄여 구조물의 붕괴에 대비하고 비와 눈에 의한 누수현상을 막는다.

월성의 성벽 또한 점성이 서로 다른 흙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재료와 다양한 축조공법으로 만들어졌다. 성벽의 최상부에는 사람 머리 크기만 한 돌이 4~5단 가량 무질서하게 깔려 있는데, 이것은 월성의 특징 중 하나로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기능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토록 필사적으로 성벽을 쌓은 것은, 왕성이야말로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보존하는 최후의 방어시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시 최고의 기술력과 막대한 인력과 물적 자원을 총동원했음에도 홍수가 나서 무너졌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유례이사금7년(290) 등에 나온다. 따라서 문헌의 기록과 더불어 C지구에서 다량 출토된 연호명 기와로 미루어 월성 성벽이 여러 차례 수리와 보수를 거쳤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럼에도 쌓으면 무너진다. 무너지면 다시 쌓는다. 이처럼 도저한 불가항력 앞에서 고대인들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통해 이루려 한다. 토지의 신이든 물과 바람의 신이든 어떤 신령에게든 희생 제물을 바쳐 애써 쌓아올린 성벽과 다리와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간절한 만큼 치열했고, 처절한 만큼 끔찍한 사람 기둥의 설화가 월성 성벽 발굴을 통해 국내 최초로 확인되었다.

2017년 5월 16일 2구의 인골이 출토된 월성 A지구 성벽 현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2017년 5월 16일 2구의 인골이 출토된 월성 A지구 성벽 현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사람이 사람의 값어치를 어떻게 매기는가, 말하자면 ‘사람 값’이 그 사회의 성숙도와 문화 수준의 척도다. 502년 지증왕은 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명씩을 함께 묻는 순장 풍습을 국법으로 금한다.(그러니까 최소 6명 이상의 순장자가 확인된 황남대총은 지증왕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527)하기 전에 생명에 대한 아버지의 자각이 있었다. 진평왕 때(600)는 수나라 유학파 원광법사가 세속오계 중 ‘살생유택’을 설파하고, 비슷한 때 백제에서도 법왕이 일체의 살생을 금해 새들을 풀어주고 고기잡이 도구를 불사르게 한다.

공식적인 인신공희는 사라졌다. 하지만 애당초 인신공희는 공개된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지 않고 대부분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우물에서는 동물 뼈와 함께 8~9세쯤 되는 어린아이의 전신 유골이 나왔는데 그 인골이 제의용인지 여부는 아직 논란중이다. 월성을 방어하는 시설인 해자에서 출토된 인골은 지금까지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인해 묻힌 사람으로 보고되어 왔지만 인주 설화가 확인된 이상 새로운 접근도 필요해 보인다.

‘고려사’에 이어 ‘고려사절요’ 희종6년(1210)에도 최충헌이 대저택을 지으며 “몰래 남녀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오색으로 옷을 입히고 저택 네 귀퉁이에 매장하여 토목의 기운을 물리친다고 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조에도 성종25년(1494) 군(君)과 옹주가 집을 지으며 주춧돌 밑에 어린아이를 묻었다는 거짓말을 유포한 자를 체포하라는 명이 내렸고, 사관이 덧붙이길 소문이 퍼지자 경기·충청·황해도의 사람들이 아이를 안고 산에 올라가 피하느라 마을이 텅 비는 데 이르렀다고 하였다.

물론 후대의 인주 설화 대부분은 유언비어로 밝혀졌다. 부자와 권력가들의 탐욕과 전횡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낭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이 엄하다고 죄가 없을까? 어두운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의 비밀은 계속된다.

1500년을 훌쩍 뛰어넘어 인골로 다시 세상의 빛을 본 두 사람,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인신공희의 제물은 주로 이민족이거나 노예이거나 죄인이었다. 때로는 ‘순결한’ 처녀와 어린아이이기도 했다. 드물게는 순교자 이차돈과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주인공처럼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보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골에서 추출한 DNA 검사를 통해 우리는 어떤 비밀을 알게 될까? ‘사람 기둥’이 되어야 했던 두 사람의 정체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밝혀질까? 죽어 성벽 아래 묻힐 때 그들의 마음이 원한이었을지 희생정신이었을지 아니면 얼떨떨함이나 황망함일지 알 수 있을까?

한 쌍의 백골 앞에 넋을 놓고 있노라니, 문득 터널과 댐과 고속도로 인근에 외로이 서 있는 위령비들이 떠올랐다. 언젠가 무심히 비문을 읽다가 ‘순직자’이거나 ‘산업전사’인 그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음에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누군가의 삶이 희생된 자리에 누군가의 삶터가 지어지는 이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니, 인간의 역사란 참으로 슬프고도 잔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