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소설가 김별아의 월성을 걷는 시간
⑥ 경주문화재연구소 이종훈 소장 인터뷰

“책임감? 월성만큼 크고 무겁습니다.”

그 또한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 1970년에 그가 태어난 황남동은 경주 시내의 주택 밀집지였다. 현재 천마총부터 황남초등학교를 거쳐 황리단길로 이어지는 지역이다. 무덤 위에 지은 삶터, 그의 동네와 그의 집 아래도 전부 신라 무덤이었다.

지금 왕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월성도 학창시절 즐겨 찾던 소풍 장소였을 뿐이다. 유적과 사적은 특별한 관심거리라기보다 공기처럼 익숙한 공간이었다. ‘어쩌다 보니’ 정해진 길을 따르는 듯, 경주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뒤 경북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이후 학예연구사로 문화재청에 입사해 조사제도와 관련된 부서에서 일했다. 대전에서 근무하다 경주로 돌아온 것은 2015년이었다.

처음에는 월성전담연구관으로 내려왔다가 2017년 연구소장에 취임했다.

돌아온 고향 경주에서 월성의 무게감만큼이나 큰 책임감으로 일하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종훈 소장(50)을 신라월성학술조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경주문화재硏 150명·조사단 60명
신라문화 직접적 체험공간 필요
‘월성 발굴조사 작업’ 큰 의미
월성의 무게만큼 책임감도 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를 보니 담당한 일이 매우 다양합니다. 월성뿐 아니라 쪽샘 지구, 황룡사지, 동궁과 월지 발굴조사 등 연구소가 하는 일이 많은데, 소장님이 월성전담연구관이었던 만큼 월성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시나요?

△연구자인 동시에 경주 사람으로서 관심도 있고 애정도 있습니다. 신라 왕경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곳이 왕이 거주하는 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라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궁궐이 가장 중요한 까닭은 궁이라는 곳이 당시의 문화와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 왕성, 왕경, 궁성이라는 표현이 혼재되어 있는데 어떻게 써야 하나요?

△저희는 ‘빛의 궁궐 월성’, ‘신라 왕궁 월성’ 등으로 궁궐과 왕성이라는 표현을 모두 씁니다. 왕궁과 궁궐은 같은 표현이고, 궁성은 성벽에 대한 문제로 이견이 있긴 하지만 문헌에 궁성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대궁(大宮)이라고 표현할 때는 남궁과 동궁, 전랑지의 북궁까지 모두 묶어서 씁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논쟁이 있지만 편하게는 왕궁도 좋습니다.

- 월성의 특별한 의미를 좀 더 설명해 주신다면?

△월성은 다른 어떤 유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다 떠나가고 했던 게 아니라 그 공간에서 건물을 짓고 무너지면 또 짓는 과정을 반복하며 600년 동안 살아왔으니까요. 경주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월성을 중심으로 도시 계획이 만들어졌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어떤 유적도 600~700년의 시간을 하나에 함축적으로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일본 나라에 가면 평성경(平城京·헤이죠쿄)이라고 있는데 그건 기껏해야 100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사용했던 성입니다. 월성은 그의 몇 배에 이르죠.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곳입니다.

- 월성 발굴조사 작업은 언제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주변부가 아닌 월성 내부에 대한 전면적이고 본격적인 발굴은 2014년 12월 12일에 개토제(開土祭·고유제)를 지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12월이 되면 꼬박 5년이 되는 셈이지요.

- ‘월성이랑’을 통해 설명을 들었는데,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935년 신라 멸망기의 유구와 유물이라더군요. 시간적으로 가장 후대의 것인데, 그 아래를 또 파볼 수 있나요? 그런데 밑을 파내면 위가 훼손될 텐데….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발굴 중에도 밑의 것을 확인만 하고 다시 덮습니다. 전공자로서의 욕심으로는 다 파보고 연구 성과를 남기고 싶지요. 하지만 그것을 우리 당대에 모두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게 저희의 판단입니다. 1979~1980년에 해자를 조사하며 동물 뼈와 씨앗 등을 발견했는데, 기록으로는 남겼지만 그때 기술로는 환경 식생 보고를 할 수 없었고 지금처럼 식생환경을 복원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불과 20년에서 30년 전의 일인데 그사이 기술이 월등하게 발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앞으로는 확인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당대에 모든 걸 다 한다는 건 과욕이고, 욕심을 부리는 것 자체가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수많은 과거를 우리 손으로 지우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경험은 상상을 제한한다. 834년 동안 신라의 왕궁이었던 월성의 가치는 지금 우리가 아는 지식과 정보로 가늠할 수 없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할 즈음이 되면 규모가 있고 화려한 건물들은 동궁이나 북궁 등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 전까지 월성 내부에 머무르며 안전성을 추구했다면 통일 후에는 보다 개방적으로 왕성을 확장했던 게다. 그래서 2017년 가을 현장 공개한 ‘가’ 지구(동궁과 월지 근처로 화장실과 수세식 변기가 발굴됨) 건물에 비하면 월성 내 C지구 건물의 기초부들은 규모와 수준면에서 격이 좀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고 한다.

- 중심이 이동한 건가요? 지하레이저로 C지구가 가장 큰 건물지라서 발굴을 시작한 게 아닌가요?

△중심이 이동했을 수도 있고 우리가 발굴한 지역이 중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요. 지하레이저로는 중심으로 보였는데 막상 파 보니 생각보다 격이 높은 건물이 아니고 관청 정도의 건물지가 확인된 것입니다. 왕이 여기서 기거했는지 아닌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성의 효용성이 다한 것은 아닙니다.

- C지구가 아니더라도 월성 내 어딘가에 왕의 침전이나 정전 같은 게 있을 텐데요?

△그걸 확인하려면 월성이나 주변부에 대한 조사가 앞으로 10년 이상 더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마음은 빨리 하면 좋겠지만 그런 욕심들이 제대로 조사를 못하게 하니까 현재 수준에서 최선의 조사를 하는 게 목표입니다. 지금 데이터를 최대한 만들어두고 후대에 연구하게 돕는 거죠. 미래에 어떤 기술이 나와서 어떤 걸 알 수 있을지 모르니까.

- 2025년 기한은 폐기되었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발굴조사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시민들에게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당대에 보고 싶은 마음도 잘 압니다. 그래서 무작정 기다려달라고 할 수 없으니 월성의 속살을 조금씩 공개하면서 이해하는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전처럼 동시다발로 한꺼번에 막아놓고 하는 게 아니라 경주 시민들이 이 공간을 쓸 수 있고, 관광객들 또한 들여다볼 수 있도록 옮겨가며 진행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월성이랑’ 옆의 개방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언젠가 C지구도 다시 덮어서 정비하고 발굴 결과를 이해할 수 있게 일정 정도 공원처럼 꾸미고 조사 지역을 이동할 것입니다.

아득해진다. 시간이 팽창되는 느낌이다. 연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이 시대만 사는 사람들이 아니구나!’는 생각이 든다.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것들의 밑을 더 파볼 수도 있지만, 지금 발굴하는 층을 모두 끝내고 그에 대한 연구와 합의가 완결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 이상은 후대의 몫…. 현재에서 과거의 비밀을 파고들지만 미래 또한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이 역사 연구자들의 자세다.

월성 발굴조사의 고민은 여러 시기의 유구들이 중복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므로 조사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내부 환경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터이니 ‘어느 시기의 유구를 중심으로 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고민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발론을 비롯한 외풍과 개별적인 연구자의 욕심에 맞서 중심을 잡고 ‘버텨야’ 한다. 학계와 시민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게 국가기관의 일일 터이니.

- 월성 발굴조사의 특이점은 다양한 행사를 포함해 대중적인 홍보나 공유 작업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뜻인가요?

△실제로 저희의 고민 중 하나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발굴조사는 당연히 학술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동떨어진, 쉽게 다다갈 수 없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주의 경우 워낙 유적이 많다 보니 저를 비롯해 경주 시민들은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발굴 작업을 보고 자랍니다. 지금도 그런 공간이 제법 있지만 현장이라는 곳에 담장을 쳐놓고 들여다보지도 못하게 하다 보니, 경주 시민들은 불신과 함께 발굴조사가 지역 경제에 걸림돌이 된다는 오해 내지는 잘못된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관광지도 실제로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을 정비하고 차후 관광지로 활용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압지, 지금 동궁과 월지라고 칭하는 지역의 복원도 학술적 논란은 있지만 발굴되고 연구되어 관광 상품으로 쓰이는 순서를 거쳤습니다.

그것을 보기 위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발굴 자료들이 역사로 서술되고 교과서에 실리는 과정에 대한 이해를 때로는 못 하기도 하고 안 하려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곳이 문화 공간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형태의 문화자원이자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발굴조사 현장을 개방하는 겁니다.

- 일반 공개 프로그램은 언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월성 발굴조사가 시작되던 2014년 기본 계획을 세우고,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해서, 2016~2017년 대중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술행사와 별개로 교육과 강연, 체험과 탐방, 전시 등을 꾸준히 진행합니다. 2018년까지 3년 동안 사진촬영대회 3회, 야간 탐방인 ‘빛의 궁궐, 월성’ 3회, 강연 행사인 ‘대담신라(對談新羅)’는 4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상시적으로 ‘월성이랑’도 운영하고 있고요.

- 경주문화재연구소 인원 150여 명, 월성학술조사단 60여 명으로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저도 경주를 여행하는 동안 줄곧 중얼거렸습니다. “이거 어떻게 하면 좋지? 이걸 어떻게 다 하지?”(웃음)

△경주가 할 수 있는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하는 일도 많습니다. 경주가 가진 문화유산은 한국에서 단연 최고이고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습니다. 경주와 교토를 비교하면서 관광객이 교토만큼 와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교와 별개로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 연간 천만이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문제는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경주에서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불국사나 석굴암 같이 고정된 게 아니라, 신라 문화를 보다 직접적으로 체험할 공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월성 발굴조사 작업이 의미가 있습니다.

- 개인적으로 월성 발굴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입니까?

△2015년 3월 기자간담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사실 비도 오고 발굴된 것도 거의 없었던 시점인데, 기자들이 40명 이상 와서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는 것을 보고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월성이 갖는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야 학술적으로 월성이 중요하니 조사를 잘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월성의 의미가 받아들여지고 있구나 생각하니 책임감과 함께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 월성 발굴조사가 앞으로 50년이 걸릴지 100년, 200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하셨는데…. 소장님은 여기 계속 계시나요?

△저는 계속 있고 싶은데 공무원이라…(웃음) 월성이 가진 무게감만큼 저도 연구자로서 개인적으로 책임감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