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거나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에 직면하면 평정심과 분별력이 쇠해진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무고(誣告) 수준으로 꾸며대며 음해하는 자나, 자명한 사실마저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와 대면할 경우가 그러하다. 그런 지경에 이르면 장삼이사들은 분노하거나 대경실색하기 십상이다. 음모와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다혈질인 사람이 창졸간(倉卒間)에 그런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면 크게 노하여 붉으락푸르락하기 마련이다.

웃음에 관한 서책을 읽다가 혼자 미소짓는다. ‘현자들은 무엇을 보고 웃나’하는 부제(副題)를 가진 ‘웃음의 철학’이 던지는 문제의식에 공감한 것이다. 서양철학의 근간이라 거명되는 플라톤은 철학에서 웃음을 추방시킨 인물로 호가 나있다고 한다. 이성과 덕을 논의하는 자리에 웃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생각을 피력한 플라톤.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부박(浮薄)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 판결을 받은 사건이 그를 웃음과 격절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뒤를 이은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의 일정분량을 웃음과 희극에 할애한다. 스승과 결이 다르게 웃음을 바라본 셈이다. 하지만 ‘시학’의 본령이 서사시와 비극에 자리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그 역시 웃음에 많은 하중(荷重)을 부여한 것 같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은 웃음에 관한 유의미한 저작이다. 형사추리소설 형식으로 웃음과 희극을 다루면서 ‘시학’제2권을 추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만물의 근원은 원자와 공허다. 다른 모든 것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사념에 불과하다.” 이런 주장을 내세운 철학자가 데모크리토스다. 특정한 공간을 채우는 가장 작은 단위이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물질적인 요소가 원자다. 그런 원자와 원자로 채워지지 않은 공간, 즉 공허로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 데모크리토스. 우리는 그것을 ‘원자론’이라 부르고, 그것은 무신론과 직결된다. 원자와 공허의 세상에 신을 위한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의 과도한 운동이나 지나친 정숙을 경계하고 알맞은 정도(metron)를 추구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웃는 철학자’라는 별칭을 가진 그는 인간과 세상사를 유쾌하게 웃은 인물이었다. 그가 명랑함을 기질적으로 타고 났는지, 혹은 동시대인들의 어리석은 광대놀음을 비웃었는지 알 도리는 없다. 그러하되 그가 남긴 명언은 음미할 만하다. “바보들만 삶에 대한 기쁨이 없다.” 지나친 진지함과 엄숙함을 경계하는 경구 아닐까?!

반면에 ‘침울한 현자’로 알려진 헤라클레이토스는 유명한 인간혐오자로 타인과 교제를 끊고 산에 들어가 외롭게 살았다.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부도덕으로 인해 분노상황에 직면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그런 행위를 하는 인간의 비참함을 애도했던 비관주의 철학자가 헤라클레이토스였다.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은 분노하지 않고, 웃음이나 눈물로 분노를 극복한 셈이다. 그들은 끝내 분노하지 않았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헤라클레이토스가 60세로 세상과 작별했다면, 데모크리토스는 100세에 이르러 고통 없이 태연하게 죽음과 대면했다는 사실이다. 웃음의 힘은 눈물의 그것을 능가하는 모양이다. 한국인들은 자칭 의사이자 우심한 건강병환자로 평생 살아간다.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대할 때마다 우국충정과 지역사랑으로 분노와 울분과 흥분으로 밤잠 설치는 분도 적잖다. 무병장수를 희구하는 그들에게 ‘웃고 사시라!’는 조언을 전하고 싶다.

분노는 분노로 해결되지 아니하고, 복수는 복수로 마감되지 않는 법. 분노를 야기하는 대상의 본질을 통찰하고 시원하게 웃음보를 날려 보내는 것이 자신과 세상에 유익한 선택일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훼손하고 모욕하는 모리배(謀利輩)들에게 분노하기보다는 풍자(諷刺)의 매서운 웃음으로 제압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