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
프랑스 파리와 허수경 시인

해질 무렵의 프랑스 파리는 아름다움과 서러움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자신 내부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과 한 번도 그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

앞의 경우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여행을 꿈꾸는 삶을 산다면, 후자는 아이들이 부르는 단조로운 동요와 같은 일상을 그저 견디고 있을 뿐, 안타깝게도 일탈의 용기를 내지 못한다. 세상에는 이처럼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인생이란 단 한 번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부류의 인간이 되기를 열망해야 할까?

이런 질문과 마주 섰을 때 시인과 여행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한 번 뿐인 인생이니, 당신의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게 옳지 않겠는가.”

높은 연봉과 창의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이들도 가끔은 그걸 포기하고 기꺼이 ‘가난한 떠돌이’ 혹은 ‘전망 어두운 여행자’의 삶을 택한다.

인도네시아의 푸른 바다 또는, 네팔의 설산(雪山)과 푸른 하늘이 던져주는 매혹에 취해서.

몇 해 전 기자가 만난 백경훈 씨가 그랬다. ‘잘나가는 광고기획자’였던 그는 촬영지로 적합할 지를 검토하기 위해 우연히 회사 자료실에 비치된 네팔 관련 비디오테이프를 본 후 인생을 바꿨다. 화면 가득 펼쳐지는 히말라야의 신비로운 풍경에 완벽히 매료되고만 것이다.

이후 3년의 짝사랑 끝에 마침내 휴가를 얻어 수천 미터의 설산들이 줄을 지어 달리는 히말라야에 다녀온 백경훈. 이후 그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네팔의 주술’에 걸렸고, 마침내 직업과 일상의 고리를 호쾌하게 끊어버렸다. 이후 그는 고액연봉자에서 ‘가난한 여행 작가’로 직업을 바꾼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 프랑스 파리의 저물녘 풍경을 보다

비단 백 씨만이 아니다. 누구나 제 마음 안에 간직한 ‘이상향’이 있다. “낭만의 절정을 맛볼 수 있다”고 알려진 프랑스 파리도 많은 이들이 여행하거나 머물고 싶은 도시 중 하나다.

바로 그 파리에 도착한 첫날. 그곳에 머물며 프랑스어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지인을 만나 가장 먼저 “에펠탑으로 가자”는 부탁을 했다. 유럽의 진홍빛 석양을 거기서 보고 싶었다. 그건 기자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잘 정돈된 거리를 달려 파리의 랜드마크(Landmark)로 불리는 에펠탑에 도착했을 땐 마침 저물녘이었다. 수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탑의 위 혹은, 아래서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말이 필요 없었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낭만과 아름다움 안에는 언제나 모종의 서러움과 눈물이 잠복해 있는 법. 한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기억 저편에서 소환된 노래 한 편이 있었으니, 허수경(1964~2018) 시인의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였다.

▲ ‘슬픔’ 속엔 언제나 ‘희망’이 숨어있고

지나온 날보다 앞으로 펼쳐 보일 시 세계가 더 기대되던 허수경 시인은 많은 독자들의 아쉬움 속에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아직은 창창한 54세의 아까운 나이에.

“우리네 삶은 슬픔을 거름 삼아 더 아름다운 곳으로 나아갈 것”이라 낙관적으로 전망했던 허수경의 빼어난 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는 1988년 초겨울 출간된 동명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

군사독재가 지배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고통과 어두움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당당히 살아갔던 서민들. 그들의 삶을 곡진한 문장과 진솔한 시어로 표현해낸 허수경의 시(詩)는 지금 읽어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그렇기에 적지 않은 문학평론가들이 허 시인을 “선명한 역사의식과 시대적인 감각을 뛰어나게 형상화해, 민중에 대한 가없는 애정과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고 상찬했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바람이 내려와/어린 모를 흔들 때’란 문학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읽더라도 ‘수난의 시절’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임에도 절망하며 주저앉지 않고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을 다시 일어서는 힘으로 바꾸겠다는 의지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허수경 시인.

맞다.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언제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운 건 기쁨보다는 슬픔의 힘이 아니었던가. 그걸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지만, 결국 진리란 소수의 깨달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걸 시인만이 아닌 우리도 알고 있다.

그래서다. 허수경이 말한 바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라는 짧은 문장은 30년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도 독자들의 심장을 아프게 때리고 예술적 자각으로 이끈다.

▲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이란 없으니…

다시 ‘꿈꾸는 삶’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위험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세상을 산다.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가봐야 제대로 된 생을 산 것이라 조언했다.

모든 것의 끝, 심지어 세상의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많은 이들의 열망을 알고 있기에 전할 수 있는 말이다.

그곳이 네팔이건, 프랑스 파리이건 낯선 땅은 오늘도 우리를 부른다. “영혼이 자유로운 자, 내게로 오라”는 목소리가 생생하다. 제 안에서 꿈틀거리며 맹렬하게 끓고 있는 ‘순정한 욕망’을 지닌 이들은 그 유혹을 떨치기가 어렵다.

백경훈은 그 유혹을 기꺼이 받아들여 히말라야의 만년설과 만났고, 기자는 아름다운 도시 파리를 붉게 물들이는 석양과 악수할 수 있었다.

마침내 수만 가지 유혹과 욕망이 끝나는 날, 꿈이 사라지는 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니 그 죽음이 마냥 슬픈 것만은 아니리라.

아래 졸시는 이런 세상사 진리를 서툴게 표현해본 것이다.

망자(亡者)의 명함

먹은 귀로 걸어가는 어두운 골목
한때 휘황하게 생을 밝히던 네온사인 모두 꺼지고
어둑한 길의 끝머리에 선 낯선 사내
손짓해 그를 불렀다
두려움보다 반가움이 먼저 왔다

사라진다는 것이 마냥 쓸쓸한 일이기만 할까
즐거움만큼이나 버거웠던 고난의 무게
물 먹은 솜을 짊어진 당나귀처럼 힘겨웠다
춤추며 노래하는 장미의 나날이 저 너머에 있다면
어찌 신(神)의 부활만 아름다울 것인가

노래가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지상에서
노래가 모든 것이 되는 천상으로

그는 떠나갔다. 총총한 걸음
소리 높여 콧노래 부르며 사라진 가난한 사내
흔들리고 때론 술렁였던 생애
망자가 지상에 머문 흔적을
명함 한 장만이 또렷이 증언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구창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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