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br>​​​​​​​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율곡 이이(1536~1584)의 율곡전서(栗谷全書), 경연일기(經筵日記)에 공직자로서 표본이 되는 한 사례가 기록돼 있다. 이 일화는 명종과 선조 연간에 활동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청백리로 선정된 인물인 이후백(1520~1578)이 이조 판서로 재직했을 때의 일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후백이 전조(銓曹)의 장관이 되어 공론을 숭상하고 청탁을 받지 않으니 정사가 볼 만하였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찾아와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전조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이조와 병조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하루는 일가 사람이 찾아와 함께 대화를 나누던 차에 관직을 구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후백이 안색을 바꾸고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그 책자 속의 이름들은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이었으며 일가 사람의 이름도 기록 안에 들어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 이름을 기록하여 후보자로 추천하려고 했었네. 그런데 지금 그대가 관직을 구한다는 말을 하니, 만약 구한 자가 얻게 된다면 그것은 공정한 도리가 아닐세. 참으로 애석하네만,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네.’ 라고 설명하니 그 사람이 대단히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이렇듯 이후백은 관직 하나를 제수할 때면 매번 벼슬할만한 적임자인지 아닌지를 반드시 폭넓게 물었으며, 합당하지 않은 사람을 잘못 제수했을 경우에는 번번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가 나랏일을 그르쳤구나.’라고 하였다. 이조는 문관의 인사를 담당한 곳인 만큼 사적인 청탁이 없을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그 어디보다도 공평무사한 덕목을 필요로 한다. 사람의 의사결정에서 공평무사함이란 사사로운 이익에 이끌려서는 안 되니, 몸에 밴 공손함과 청렴하고 검소한 성품이 있어야 가능했던 것이다. 이후백이 이조 판서라는 막강한 지위에서 사심을 배제하고 공정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부귀와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과 절약으로 철저히 선비로서 공인정신을 완성해 나갔기 때문이다. 공직의 직분을 다하고 스스로 단속하여 청고(淸苦)함을 지키니 육경(六卿)의 지위에도 가난하였지만 검소하기가 유생과 같았고 뇌물을 일체 받지 않아 손님이 와도 밥상이 초라하였다고 하니, 청백리로 선정된 이유를 알 만하다. 이후백은 명종에게 ‘검소하면 씀씀이가 자연 번다하지 않게 됩니다. 만약 임금이 한 번 부국(富國)에 뜻을 두면 세금을 거두는 신하가 으레 먼저 자신의 사욕을 채울 것이니,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고 부국에 성심을 다할 자가 또한 몇이나 되겠습니까.’라고 아뢰어 임금이 솔선해 검소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선비정신은 의를 실현하고 지조를 지키는 꼿꼿함이라든가 혼자 있는 곳에서조차 흐트러지지 않는 위용 등으로 표현되지만, 그 바탕에는 공손과 검소함이 있다고 보겠다. 이 두 가지가 몸에 밴 사람은 남을 존중할 줄 알며 정도를 넘지 않는다. 그래서 맹자는 선비를 두고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으며, 성공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요즘 언론을 통해 접하는 우리의 위정자나 공직자들 모습에서 이후백과 같은 청렴함과 공평무사함을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자신의 이익이나 부를 위해 탈당과 복당을 거듭하고 온갖 허언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또한 강원랜드나 목포 문화재거리의 부동산투기의혹 사건 등 정치인들의 일탈을 보면 ‘애민정신’을 갖춘 바람직한 공직자상은 실종 된지 오랜 것같은 생각이 든다. 올바른 정치이념은 우리사회를 이끌어 가는 근간이다. 우리는 모두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 묶여 있기에 올바른 정치인을 가려서 선택해야하는 의무가 유권자들에게 있기에 그 책임이 크다고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