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본다’는 행위로만 말하기엔 영화를 ‘소비’ 한다는 느낌이 짙게 묻어난다. 물론 영화는 오락물이며, 산업이며, 예술로서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진 매체이기에 어느 것 하나로 규정짓는 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나 영화관에서, TV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좀 더 능동적인 자세로 영화를 대하고자 하는 마음에 ‘영화 읽기’라고 표현했다. 하루에도 수 십 편씩 쏟아지는 영화들 중에서, 혹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영화들을 지면으로 소환해 ‘읽기’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 ‘영화 읽기’를 통해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배가 되기를 바라며, 또 다른 의미를 찾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상실과 희망을 변주하는 두 편의 영화,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과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

 

영화 ‘다가오는 것들’.
영화 ‘다가오는 것들’.

 

◇삶의 균열은 무엇으로 채우는가? 영화 ‘다가오는 것들’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다.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 저명한 철학교수인 남자의 아내, 죽음이 임박한 홀어머니의 딸이다. 견고한 사회적 입지와 건실한 가정을 쌓아왔을 시간. 그 이후의 시간들이 균열되고 흘러가는 과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제목은 ‘다가오는 것들’이지만 실상 그 내용은 다가오는 것들보다 멀어지는 것들이 많은 나이며, 다가오고 멀어지는 것들의 교차점에 선 한 여자의 이야기를 지적이면서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시험지의 질문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 질문은 주인공 나탈리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 전체를 꿰뚫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견고하게 쌓아왔던 그녀의 세월. 그녀의 가정과 철학적 신념들, 학생들에게 던지고자 했던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 앞에 그녀가 서게 된다.

죽을 때까지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았던 남편이 “딴 여자가 생겼어. 그 여자랑 살고 싶어”라고 하며 이혼을 요구한다. 질문에 답할 시간은 이렇게 통속적이며 느닷없이 그녀에게 찾아 온다. 그곳에 철학적 물음이나 일상적인 분노는 없다. 오직, 매년 여름 가족들과 함께 찾아갔던 바다가 있는 남편의 별장을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과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가꾸었던 정원, 아이들과의 추억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다는 상실감이 크게 자리 잡는다. 25년을 견고하게 다져왔던 것의 절반이 사라지는 순간이며, 그것은 서재를 가득 메웠던 책의 절반을 남편이 들고 가버린 장면처럼 허전하다. 여기에 자신이 열심히 밑줄까지 그으며 읽었던 레비나스를 남편이 가져가버린데 대한 분노가 있다.

별장의 추억에 이어, 영화의 시작과 함께 던져졌던 질문인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의 답이 될 수도 있는 지침서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의 존재’를 깊게 사유했던 서양철학은 20세기 초입에 들어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의 등장으로 귀결되고, 그 결과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막지 못했다. 레비나스에 의해 ‘타자(타인)’에 대한 사유를 달리하면서 ‘나의 존재’와 ‘타인’을 달리 사유하게 된다. 바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선을 행함으로써’ 악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가져가버린 책이 왜 레비나스였던가의 이유다.

균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랜 자부심을 가지고 집필해 왔던 철학총서는 유행에 뒤졌다며 다른 교재로 대체되고, 아이들은 성장해서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딸에게 과도하게 집착했던 엄마는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녀 곁에 남은건 엄마가 키우던 뚱뚱하고 늙은 고양이 ‘판도라’뿐이다. 그리고 하나 더. “고3때 선생님의 수업과 책이 저를 붙들어줬어요. 철학을 발견하게 되었지요”라고 말했던 그의 애제자 파비앵과의 다가오는 것들과 멀어져 가는 것들의 충돌이 있다.

 

‘다가오는 것들’ 포스터.
‘다가오는 것들’ 포스터.

 

파비앵은 그의 친구들과 시골 공동농장에서 치즈를 만들고 글을 쓰며 지낸다. 남편과 헤어진 나탈리는 여름마다 찾았던 바다가 있는 남편의 별장 대신 파비앵의 공동농장을 찾는다. 시골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나탈리가 새로 산 레비나스를 펼쳐드는 장면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할까?’라는 질문의 끈질긴 반복이며, 파비앵을 찾아가는 나탈리의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희망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희망도 여지 없이 무너지고 만다. 급진적 실천주의자인 제자는 했다”고 항변을 하지만 “사적 영역에 한해서요. 평소에는 원칙을 지킬 테지만 삶의 근간을 흔들지 모르는 사상은 외면하시잖아요. 시위나 서명 정도로 스스로를 참여 지식인으로 여기죠”라고 비판한다.

이제 이 균열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가 남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 균열을 나탈리에게 다가 올 허전하고 쓸쓸하며 헛헛한 상실로 채운다. 그래도 나탈리의 딸이 손녀를 낳자 할머니가 되고, 늘 그렇듯 책을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다가오는 것들에 밀려 멀어져 가는 것들을 받아들인다. 25년 동안 들었던 브람스와 슈만이 ‘사실은 지겨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 세월 속에서도 처음 겪는 이혼과 죽음이 있으니, 멀어져 가는 것들 속에서 ‘다가오는 것들’의 세월이 버티고 있다. 그것이 굳이 행복이 아니어도 좋을 시간. 일상의 풍경 속에서 밀고 올라오는 것과 밀려가는 것의 잔향이 담담하게 어우러진다. 그 화면에 아름다운 OST가 흐른다.

 

영화 ‘로마’.
영화 ‘로마’.

 

◇비울수록 채워지는 영화 ‘로마’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이 견고하게 쌓아왔던 것들의 미래를 표현하고 있다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는 그 대척점에 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가오는 것들’이 현재에서부터 다가올 시간에 펼쳐질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로마’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1970년대 멕시코시티 내 ‘로마’라는 지역의 중산층 가정의 젊은 가정부 클레오의 하루 일과로 영화는 시작된다. ‘다가오는 것들’의 주인공인 나탈리와 ‘로마’의 주인공인 클레오는 그 신분에서부터 차이를 보인다. 여기에 영화는 흑백화면 가득히 마당을 쓰는 빗자루 소리로 시작해 하루 일과를 알리는 알람소리와 빨래하는 소리, 식사를 차리고 그릇을 부시는 소리와 담장을 넘어노는 새들의 지저귐과 길거리의 소리들이 가득 화면을 채운다. 그리 대사가 많지 않은 ‘다가오는 것들’조차 ‘로마’에 비하면 수다에 가까울 정도로 이 영화는 극도로 절제된 대사를 사용하고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을 반복하는 클레오에게도 여전히 남자는 부재의 존재라는 것이다. 클레오의 남자 친구 페르민은 클레오가 임신한 사실을 알자 그녀의 곁에서 도망친다. 클레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집주인인 소피아의 남편까지 외도를 일삼으며 가족의 품을 떠난다.

영화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 자신을 키워낸 여성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작품으로 클레오는 감독이 “가장 사랑했고 애정을 가진 캐릭터이며, 상처를 함께 공유했던 캐릭터”로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가사도우미 리보 로드리게즈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이 스쳐가듯 등장하는 책들과 철학자들의 말들을 알고 있거나 이해함으로써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면 ‘로마’는 그러한 지식이 없어도, 오히려 깊은 의미를 찾지 않고 비워 낼수록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영화라고 하겠다. 바로 절제하고 생략함으로 그 빈 공간을 채우는 영화다. 대사가 그러하고 배경음악 없음이 그러하며, 흑백의 거친듯 섬세한 화면이 그러하다.

 

‘로마’ 포스터.
‘로마’ 포스터.

 

여기에 감독의 개인적인 삶과 스토리가 펼쳐졌던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1970년대의 가정의 상처와 멕시코의 상처까지 교차하고 있다. 자전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시선은 본인이 아닌 자신을 키워준 유모 클레오의 시선을 따른다. 어떠한 미화도 주관적인 시선도 배제한채 가장 안정적인 카메라 구도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시선뿐만 아니라 영화를 가득 메우고 있는 소리까지 클레오의 귀가 들었을 거리감과 입체감을 두어 시각과 청각까지 온전히 녹여내고 있다.

영화는 클레오가 지저분한 마당을 물로 씻어내는 장면과 소리로 시작해 흰 빨래를 들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 끝난다. 마당에 고인 물에 비친 비행기의 모습에서 시작해 맑고 푸른(?) 하늘을 가로 지르는 비행기가 사라지면서 끝난다. 가장 낮고 더러운 곳에서 가장 높고 맑은 곳으로, 수평의 공간에서 수직의 공간을 오르며 사라지는 클레오의 모습 속에서 ‘멀어져가는 것들’을 담으며 잔잔하게 다가와 묵직한 감동을 남긴다. 비로소 영화 제목 ‘ROMA’가 화면을 채우며 영화는 시작처럼 끝이난다.

※ 미야 한센-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은 네이버영화나 구글플레이에서 실시간으로 스트리밍과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으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는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김규형씨는 포항에서 태어나 영남대 조형대학원에서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