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br>​​​​​​​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사람에게 망각이라는 기능이 없다면 평생 끝이 없는 슬픔과 괴로움, 번민과 수치에 시달리며 고통으로 살아갈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상실하는 것도 고통인 반면 잊어야할 것을 잊지 못하는 괴로움도 큰 고통이다. 이 망각에 대한 일화가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편’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 전국시대 송나라의 화자(華子)는 건망증이 아주 심했다. 오전에 생겼던 일들을 저녁이면 잊고 저녁에 일어난 일들은 이튿날 아침이면 모두 잊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화자의 건망증은 낫지 않았다. 어느 날 노나라 선비가 찾아와 화자의 건망증을 깨끗이 고쳐주었다. 그런데 화자는 고마워하기는커녕 화를 내며 창을 쥐고 선비에게 달려들었다.

사람들이 화자를 뜯어말리며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건망증이 있었을 때는 세상의 존재조차 잊고 살았는데, 이제 지난 일을 기억하게 되니 평생 동안 잘하고 못한 일, 기쁘고, 슬픈 일, 좋고 나쁜 일 등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앞으로 남은 생애동안 이 기억이 내 마음을 어지럽힐 것이 두렵다. 잠시나마 잊고 싶어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화자가 건망증을 고쳐준 선비에게 화를 낸 이유는 잊었던 과거가 모두 떠오르자 그것을 스스로 감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경험이나 학습한 것을 재생하는 능력이 없는 망각이 과연 축복인가. 저주인가? 이 물음에 자연이 인간에게 준 ‘축복과 저주’사이를 넘나드는 것이 ‘기억과 망각’이라고 하겠다. 축복의 측면에서 보면 기억은 과거의 잘못을 잊지 않고 반성함으로써 미래에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고, 망각은 과거의 불행을 잊게 함으로써 미래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저주의 측면에서 보면 기억은 과거의 불행이나 옳지 못한 행동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늘 괴롭다는 것이고, 망각은 과거의 잘못을 잊음으로써 미래에 같은 잘못을 또 저지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망각과 기억은 사람에게 ‘자유와 속박’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은 과거가 되어버린 자기만의 시간 속에는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유영하고 있다. 그 기억의 조각 하나하나에 희노애락을 느낀다. 수많은 기억 중 나쁜 것은 사라지고 좋은 것만 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고 하겠지만, 좋은 기억은 쉽게 잊고 나쁜 일은 오히려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된다. 이렇듯 좋은 것만 오래 간직하고픈 것이 인간의 기본심리임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삶이 힘들고 고달픈 것이다.

고통의 근원이 되는 분노를 빨리 잊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심리적인 평형을 찾는 과정이다. 해묵은 과거의 고통을 마음속에 두고 버리지 못한다면 개인은 물론 사회까지 병들고 말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기에 언론에 드러난 위정자나 공직자의 일탈행위는 망각이 주는 해방감보다 상실로 인한 피해가 더 크다. 기억과 망각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회일수록 값비싼 비용을 치러도 정치는 후지며 사회는 부정부패와 범죄로 점철되는 것이다.

물고기가 어항에서 살 수 있는 것은 기억력이 없기 때문이며, 굴참나무가 싹을 틔워 숲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다람쥐가 땅속에 묻어둔 도토리를 건망증으로 잊기 때문이다.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잊지 말아야 할 지난 잘못을 잊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망각을 마냥 축복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 부작용이 너무 큰 과거가 있었으니, 수많은 외침은 차치하더라도 구한말 정쟁으로 국력은 약해져 일제로부터 국권을 피탈당하는 경술국치(1910)는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의 단절이라는 치욕을 가져왔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세계에서도 비슷한 예가 없는 대규모 집단적 민족저항 운동으로 제국주의 만행을 천하에 알린 ‘삼일절’은 올해로 100돌을 맞는다. 나라 잃고 수탈과 탄압에 항거한 이 날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우리 민족의 교훈이 담긴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