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소설가 김별아의 경주 월성을 걷는 시간
② 문헌 속의 월성 ‘삼국사기’

국립경주박물관과 동궁과 월지 사이의 상공에서 본 월성. 초승달 형태의 월성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노라니 “어떻게 소설을 쓰느냐?”만큼이나 자주 듣는 질문이 “어떻게 소재를 얻고 취재를 하느냐?”는 것이다. 독자들뿐 아니라 연구자들까지 역사를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궁금해 하는데, 사실 대답은 간단하다.

“공부합니다.”

졸작 ‘미실’을 쓸 때부터 밑도 끝도 없는 공부가 습관이자 의식이 되었다. 일단 그 시대의 기록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면 짐짓 근엄하고 복잡해 보이는 역사 속에서 이야기의 실마리가 보인다. 그 순간 그것을 거머채면 그만이다.

원칙적으로 시작은 정사(正史)를 읽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삼국시대는 ‘삼국사기’, 고려시대는 ‘고려사’, 조선시대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본으로 하고 이어 기타 사서와 연구 논문과 자료들을 읽는다.

‘미실’의 배경은 서라벌, 그중에서도 왕성인 월성이다. 하지만 ‘미실’을 책으로 펴내고도 한참 후에야 월성 터를 둘러보았다. 장편 ‘논개’의 배경이 된 진주성 또한 마찬가지다. 소설은 이미 내 손을 떠났는데 뒤늦게 남강 앞에서 처절했던 2차 진주성 전투 끝에 6만이 도륙되어 성안에 시체로 첩첩이 쌓이는 상상으로 전율했다.

게으르고 미련한 성격 탓이기도 하려니와 문헌의 행간(行間)을 탐독하는 일이 현장을 둘러보는 일만큼이나, 아니 때로는 더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미실’의 배경은 서라벌 월성
소설책 내고 월성 터 둘러 봐
신라 왕성은 금성서 월성으로

삼국사기에 ‘월성’ 16회 등장
월성 쌓은 사람은 신라 5대 왕
‘월성 터’ 현재 인왕동 이견 없어
월성, 신라 흥망성쇠와 함께해

 

그래도 월성은 눈으로 보고 발로 그 터를 밟고 싶었다. 일단 기차표부터 끊어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해 논란은 있으나 빈약한 고대의 기록에 향미를 더하는 ‘화랑세기’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쇠와 돌에 새겨진 글이 아니고서야 추정과 비정(比定)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터이니 비전공자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보수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허공을 떠도는 망상이 아닌 자유로운 상상을 펼치려면 두 발은 굳세게 사실을 딛고 서야 한다.

우선 삼국시대의 정사(正史) ‘삼국사기’부터 펼친다. 고려 인종 23년(1145년)경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신월성(新月城), 만월성(滿月城)을 제외하고 궁성인 ‘월성(月城)’이 16회 가량 등장한다.(신라본기 12회, 잡지 1회, 열전 3회) 월성이라 명명하는 대신 왕성(王城), 재성(在城)이라 쓰기도 하고, 월성 내 왕의 거처를 대궐, 궁궐, 왕궁, 대궁(大宮)등으로 표현한 대목도 있다. 또한 내전(內殿) 외에도 일본국 사신을 접견한 조원전(朝元殿), 음악 연주를 관람한 숭례전(崇禮殿), 활쏘기를 관람한 강무전(講武殿), 발[簾]을 쳤던 서란전(瑞蘭殿), 정사를 돌본 평의전(平議殿) 등의 전각들과 망은루(望恩樓), 명학루(鳴鶴樓), 월상루(月上樓) 등의 누각, 인화문(仁化門), 현덕문(玄德門), 무평문(武平門), 준례문(遵禮門) 등 문의 이름이 등장한다.

특히 ‘삼국사기’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월성이 왕성으로 자리 잡는 내력이다. 실제로 월성을 쌓은 사람은 신라의 5대 왕인 파사이사금이다.

22년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이름했다.(...)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파사이사금 22년이면 서기 101년, 신라가 건국한 기원전 57년에서 158년이 지난 후다. 그렇다면 시조인 혁거세거서간,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탈해이사금, 그리고 파사이사금 또한 재위 후 21년쯤은 다른 왕궁에서 사셨다는 말씀이다. 월성 이전의 왕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잡지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宮城)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하였다. 파사왕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하고 혹은 재성이라고도 하였는데 둘레가 1,023보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중략)...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

혁거세거서간이 6부의 촌장들에게 왕으로 추대받은 것이 13세이니 34세쯤에 자기 손으로 자신의 집을 지은 것이다. 보랏빛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와 짝이 되려면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나온 알영 정도는 되어야 한다.

혁거세와 알영의 신혼집에 대한 정보는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는데, ‘궁실을 남산 서쪽 기슭 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지었다고 한다. 창림사 터는 혁거세가 탄생한 나정에서 걸어서 20분 남짓 거리에 있는데, 남들이 얻어준 집이라서인지 후대의 가미인지 아직까지는 궁터의 흔적도 별다른 이야기도 발굴되지 않았다.

월성을 쌓은 신라의 5대 왕인 파사이사금의 능이 있는 곳으로 알려진 오릉의 모습.
월성을 쌓은 신라의 5대 왕인 파사이사금의 능이 있는 곳으로 알려진 오릉의 모습.

신라의 왕성은 창림사 터의 궁실에서 금성으로, 금성에서 월성으로 이동했다. 월성이 금성의 동남쪽이니 금성은 월성의 서북쪽, 대개 고려 때 석성(石城)을 쌓은 경주읍성지나 황룡사 북쪽의 북천 부근으로 비정(김병모,1984)한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월성이 현재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월성은 말 그대로 성의 모양새가 초승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월성을 찍은 위성사진을 보면 낫 같기도 하고 눈썹 같기도 한 초승달 모양새가 선명하다. 알천(북천), 문천(남천), 모량천(서천)의 세 물줄기를 끌어안은 월성은 어섯눈으로 봐도 상서로운 알짜배기 땅이다. 그런데 파사이사금이 그곳에 궁성을 짓기까지는 전왕인 탈해이사금의 역할이 컸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아 어미를 공양했는데 게으른 기색이 전혀 없었다. 어미가 말했다. “너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고 골상이 특이하니 배움에 정진해 공명을 세워라.” 이에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아울러 지리를 알았다. 양산(楊山) 아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 길지라고 여겨 속임수를 내어 차지하고 이곳에 살았다. 이곳은 뒤에 월성이 되었다.

문명의 조명이 없는 고대의 깜깜나라를 밝히는 것은 신비다. 본래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다는 다파나국의 왕자였으나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려져 금관국을 거쳐 진한의 아진포에서 거둬진 석탈해는 2m14㎝(9척)의 잘생긴 이방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재능이 있었던 듯, 그 상서로운 땅을 단번에 알아본다.

하지만 아무리 땅이 좋아보여도 엄연히 주인이 있는데 속임수를 내어 차지하다니! 천년 왕성의 토지 취득이 비합법적이거나 비도덕적이었다면 좀 찜찜하지 않은가? 그 ‘속임수’가 어떤 내용이었는가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나온다.

때는 남해차차웅 시절, 석탈해는 토함산에 올라 굽어보다 찾은 ‘오래 살 만한 곳’을 얻기 위해 꾀를 낸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근처에 묻고 이튿날 아침 찾아가서는 대뜸 큰소리친다.

“여기가 본디 우리 조상의 집이었소!”

집주인인 호공으로서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니저러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관가에 가게 되었는데 관에서 석탈해에게 묻는다.

“무엇으로써 너의 집임을 증명하겠는가?”

“우리 집안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고을에 가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그 땅을 파서 조사해 주십시오!”

마음먹고 속이려는데 속지 않을 재주가 없다. 땅을 파니 과연 미리 묻어둔 숫돌과 숯이 드러나는지라, 석탈해는 호공의 집을 홀딱 집어삼키게 되었다. 그런데 호공은 백주대낮에 속임수로 집을 빼앗기고도 석탈해에게 원한을 품거나 신라왕조에 반감을 갖지 않는다.

토함산에 올라 월성을 궁성 터로 점지한 탈해이사금이 아기일 때 신라와 만나게 된 모습을 표현한 조형물.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 해변 테마거리에 만들어져 있다.
토함산에 올라 월성을 궁성 터로 점지한 탈해이사금이 아기일 때 신라와 만나게 된 모습을 표현한 조형물.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 해변 테마거리에 만들어져 있다.

이 이야기가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가진 도래 세력에 의해 토착 세력이 밀려나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라는 교과서적 정답 외에도, 일찍이 벽초 홍명희의 아들인 국어학자 홍기문이 의심한대로 호공은 단순한 사기극의 피해자 일인이 아니라 특정 집단을 상징할 가능성이 크다.

그는 혁거세거서간 38년에 마한에 사신으로 가는가 하면 탈해이사금 9년에 계림에서 김알지를 발견한다.

알지를 발견할 때 호공의 나이는 적어도 100살! 그래서 호공을 개별 인물이 아닌 박[瓠]의 문화를 대표하는 박씨 호공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결국엔 속고 속이는 일이 다 정치적 기술(!)이었던 게다.

권력에는 쟁투가 따르기 마련이고 왕성인 월성은 그 혈투극의 주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평왕 53년(631) 흰 개가 월성 담장[宮墻]에 올라가더니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일으켰고, 진덕왕 원년에는 비담과 염종이 명활성에 주둔한 채 월성에 머문 왕의 군대와 열흘 동안 대치했다.

혜공왕 4년(768) 호랑이가 월성 안에 들어오더니 대공과 대렴이 반란을 일으켜 33일간 왕궁을 에워쌌으며, 같은 왕 16년(780) 누런 안개가 끼고 흙비가 내리더니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에워싸고 왕과 왕비를 죽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속의 월성은 신라의 흥망성쇠와 함께한 왕정(王政)의 중심이다. 사람이 사는 월성에서 느닷없이 설치는 흰 개와 호랑이는 왕권을 위협하는 반란의 징조였다. 신라의 정치는 모두 그곳에서 비롯되었고 마감되었다.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던 여섯 촌락의 사람들이 알에서 태어난 왕을 받들어 나라를 세우고, 성을 쌓고 넓히고 보수하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맞서 지켰다. 삼한을 통합하는 위업을 세우며 한때 국제적인 ‘황금의 나라’를 건설했으나, 반란과 실정으로 쇠락하여 끝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 천년 드라마의 무대로서, 목격자로서, 월성은 묵묵했다. 그리고 다시 천년이 지나 폐도의 황성 옛터인 채로 월성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가 품은 찬란한 비밀이 얼마만할 지는 아무도 모르고 상상조차 못하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