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
캄보디아와 서정주 시인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만난 노점상 소년. 궁핍하게 살아가지만 눈동자는 한없이 맑았다.

‘가난은 실체가 아닌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풍경’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빈자가 10가지 걱정이 있다면 부자는 100가지 걱정을 하고 산다”는 옛말에 기대 현재의 곤궁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면서 그런 느긋한 태도를 취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왜냐? 가난이란 그 자체로 인간을 위축시키고 주눅 들게 하는 탓이다.

각종 신문과 방송을 통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의 슬픈 사연’은 우리를 서글픔으로 이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아래와 같은 소식을 보자.

10~20만원의 단칸방 월세가 없어 노숙자로 전락한 중년의 실업자, 생활비로 고민하다 가족과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한 가장(家長), 끝끝내 생을 버티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결국엔 유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모녀 가정….

이처럼 가난은 치명적 고통을 품은 채 우리 곁에 웅크려 있다. 아무도 예기치 않은 가난의 ‘습격’을 바라지 않지만, 누구도 가난이 주는 ‘위협’에서 피해갈 수 없다. 안타깝지만 그게 엄연한 사실이다.

아프리카와 동남부 아시아엔 대부분의 국민이 ‘보편적 가난’ 속을 살아가는 나라가 적지 않다.

전기와 상수도 공급 등 인간적 삶을 누릴 최소한의 인프라조차 갖춰지지 않았고, ‘사회 복지’라는 단어를 사용해본 적이 없는 국가들. 거기다가 인종과 종교,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해묵은 갈등으로 오랜 기간 지속된 끔찍한 내전(內戰)까지.
 

무등(無等)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 캄보디아에서 만난 한 소년을 기억하다

미려하게 조각된 10세기 전 석조 건물 앙코르와트, 오염되지 않은 바다와 숲을 가진 캄보디아 역시 가난한 국가다.

수도인 프놈펜과 한 해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시엠립과 시아누크빌을 잇는 도로 정도만 아스팔트로 포장됐을 뿐, 캄보디아 대부분의 길은 여전히 황토 먼지가 풀풀 날린다.

외국에서 온 여행자를 위해 만들어진 호텔을 나와 30~40분만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만날 수 있는 캄보디아 서민들의 마을. 그곳엔 전기가 제한적으로 공급된다. 가로등이 없는 밤은 캄캄절벽이다.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을 포함한 크메르 유적으로 이름 높은 ‘오래된 도시’ 시엠립. 거기엔 학교를 다니지 않고 거리에서 조악한 기념품을 팔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겠지만 그들이 학생으로 살아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가난 때문이 아닐지.

세 번째로 시엠립 앙코르와트를 찾았던 때다. 1천 년 전 만들어진 웅장한 사원의 돌기둥 사이에 수줍게 서있던 한 소년과 만났다. 1~2달러짜리 나무피리와 장식품을 팔고 있는. 눈동자가 너무나 선량했고, 그랬기에 더 슬퍼보였던 아이.

‘가난’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초월해 존재한다. 그랬기에 가난을 노래한 문학작품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어떤 시와 소설은 탁월하고, 또 다른 어떤 것들은 시원찮기도 하다.

그날 캄보디아 시엠립의 노점상 소년을 보며 기자는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시 한 편을 떠올렸다.

가난을 노래한 탁월한 작품 ‘무등을 보며’다.
 

시엠립 곳곳에 산재한 1천 년 전 크메르의 유적.
시엠립 곳곳에 산재한 1천 년 전 크메르의 유적.

▲ ‘빼어난 시’로도 완벽히 위로할 수 없는 고통

한국 역시 아프리카나 동남아 국가처럼 대부분의 국민이 가난했던 시절을 지나왔다.

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걷히지 않은 1950년대 중반. 한 대학에서 박봉을 받으며 학생들을 가르치던 서정주 시인 또한 가난하고, 또 가난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시인이 가난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던 듯하다. ‘무등을 보며’는 이런 상황에서 탄생한 노래다. 시에선 물질적 곤궁에 시달리지만 정신적 여유만은 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이 읽힌다.

현실이야 끼니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지만 맑은 눈을 들어 ‘눈부신 햇빛 속 초록빛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산’을 바라보겠다는 시인.

가난이 인간의 선량한 본질까지 파괴할 수는 없다 는 완곡한 메시지. 재론의 여지없이 절창이다.

산은 자신의 품 안에서 향기로운 꽃과 풀을 기른다. 그처럼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을 기르며 오늘의 결핍을 이겨나가야 한다는 건 1950년대나 2019년 오늘이나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책무가 아닐까. 서정주는 이 사실을 미학적인 문장으로 설파하며 가난에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라는 낙관적 세계관을 드러내며 ‘가난이 보편인 시대’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과연 뛰어난 시인답다.

하지만, ‘시엠립의 소년’도 그럴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예술가처럼 가난을 낭만으로 받아들일 여유로움을 갖추지 못한 10대 초반의 아이. 또래 친구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돈벌이에 나서야하는 서글픈 현실. 소년에게 가난은 얼마나 크고 막막한 어둠일까?
 

시엠립 앙코르와트를 찾아온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
시엠립 앙코르와트를 찾아온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

▲ 시련이 소년을 타락시키지 않았으면…

가난한 나라를 여행한다는 건 사람의 심장을 흔드는 일이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결핍의 풍경을 바라보는 게 유쾌한 체험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캄보디아와 만나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가난으로 인한 어떠한 형태의 고통과 시련도 인간을 완벽하게 파괴할 수는 없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에. 아래는 그런 깨달음을 산문 형태로 쓴 졸시다.
 

어떤 나라의 여름

가난과 웃음, 그 불협화음을 철지난 훈장으로 주렁주렁 달고 사는 나라. 메콩강 지류가 잠시잠깐 머무는 동남아시아 작은 마을엔 스물두 살 키 작은 청년이 산다. 한 달을 일하면 월급으로 25달러를 받는다.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취객의 오만가지 주정을 받아내면서도 뭐가 좋은지 키들키들.

열아홉, 아직 소녀인 그의 아내는 같은 술집에서 월 20달러를 받고 일한다. 한 달 내내 제 키보다 높은 테이블에 붙어 서서 스웨덴과 네덜란드,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또래 애들의 술병과 술잔을 나른다. 인근 시장 좌판에 내걸린 중국산 청바지를 생일선물로 받은 날은 울었단다. 그 얘기를 전하면서도 어린 남편은 시종 깔깔대고.

그들과 양귀비꽃 흐드러진 골짜기로 소풍을 다녀온 날 밤. 잠복했던 연민의 도화선이 뜨거워졌고, 새파란 불꽃이 넘실대는 보드카 여덟 잔을 들이켰다. 술이 아닌 불을 마셨다. 자정이 되기 전 정신을 놓아버린 날 부축해 호텔방에 눕힌 건 어린 부부였다고.

멈췄던 기억의 회로가 겨우겨우 작동의 스위치를 켠 아침. 450달러가 든 지갑만이 아니었다. 여권과 비행기 티켓, 주머니 속 동전 하나 없어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후 놀라움보다 먼저 찾아온 슬픔에 목구멍에선 휘발유 냄새가 났고.

마을을 떠나던 날. 얼기설기 나무로 지붕을 덧댄 버스터미널에선 싫다는 그들의 손에 억지로 45달러를 쥐어주기 위한 승강이가 벌어졌다. 그 돈은 부부의 한 달 수입이었고, 태국의 하룻밤 화대였으며,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기차의 편도요금이기도 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구창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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