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지난 20세기는 격동의 세기다. 전기와 석유, 내연기관과 플라스틱, 컨베이어벨트 시스템 등으로 대표되는 2차 산업혁명이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가능케 한다.

그와 아울러 러시아와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1∼2차 세계대전, 한국동란과 베트남전쟁, 사회주의의 퇴조와 소련 및 동구 실존 사회국가들의 몰락 같은 사회·정치적인 격랑(激浪)이 지구촌을 강타한다.

미증유의 역사적 사변을 목도한 대중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지난 세기 초중반에 세계적인 반 유토피아 소설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사회주의 소련의 작가 예브게니 자먀틴이 집필한 ‘우리들’(1924)이다.

‘은혜로운 분’이 홀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되, 이름도 없이 숫자와 기호로 표시되는 다수 대중은 자유의지를 완전 망각한 채 누구나 동일한 일상을 영위해 나간다.

인간이 주고받는 사랑이 전체주의 체제를 전복(顚覆)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란 확신을 가진 여주인공 I 330. 그녀는 사랑에 호응하는 남자 D 503을 자유의 편으로 인도한다. 그들이 경험하려는 신생(新生)과 신세계의 열망이 어떠한지, 과연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는지, 거기서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무엇인지, 그런 면이 우리의 흥미를 자아낸다.

1932년에는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장편소설 ‘멋진 신세계’를 출간한다.

태어날 때부터 알파부터 감마 등급까지 인간을 배양기에서 생산하는 미래사회. 등급에 따라 세계를 지배하는 10인 총통의 일원이 될 수도 있고, 하수구 청소부로 전락할 수도 있다.

2535년을 시대배경으로 하는 ‘멋진 신세계’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배제한 전체주의 통제사회를 그려낸다.

가족과 가정, 일부일처제가 폐지되고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이라는 논리가 지배적인 세계국가에서 사랑을 매개로 한 남녀관계는 허용되지 않는다.

거주민들은 괴롭거나 불편하거나 외로움을 느끼면 ‘소마’라는 알약을 먹는다. 행복감과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소마는 그들에게 열락과 희열을 제공한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는 말로 세뇌된 그들에게 야만인 구역의 청년 존이 나타남으로써 사건이 역동성을 얻게 된다.

자먀틴과 헉슬리의 뒤를 이어 조지 오웰(1903∼1950)이 1949년에 ‘1984’를 세상에 내놓는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에 등장한 희대(稀代)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을 빅브라더로 상정한 소설이 ‘1984’다.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대형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고, 텔레스크린으로 사람들을 감시하는 통제사회.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이란 표어가 내걸려 있는 오세아니아 진리부의 건물.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잠재된 저항의식으로 줄리아와 금지된 사랑을 하고 해당(害黨)행위를 하다가 고문실에 구금된다.

2 더하기 2는 4라는 자명한 이치를 부정해야 하는 스미스. 2 더하기 2의 해답은 빅브라더와 당이 결정한다.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의 ‘무오류설’을 주창했던 1940년대 소련의 실상을 풍자하고 공격하는 조지 오웰. 그것에 대한 저항은 역사의식과 자유의지로 무장한 대중의 각성과 투쟁에 있다고 믿은 오웰.

반 유토피아 소설을 거명한 까닭은 아베 신조 때문이다. 정치적 입지가 취약해질 때마다 한반도를 물고 늘어지는 아베의 술수가 고약하다. 한반도 분단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북한 핵을 과장해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헌법을 수정하려는 아베. 한국 해군함정과 일본 초계기의 충돌을 문제삼아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아베 신조. 그의 행악질을 보면서 각성한 대중의 힘이 작용하는 한국과 깊이 잠든 이웃나라 일본을 떠올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