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소설가 김별아의 경주 월성을 걷는 시간
① 천년 왕성, 월성의 모든 시간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한 신라의 천년 왕성인 월성. 하늘에서 본 월성은 현재의 모습도 그 이름대로 초승달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월성 곳곳의 파란 천막이 덮인 곳은 그 옛날 신라와 현재를 연결해줄 발굴작업 현장이고, 지금은 날씨 관계로 작업이 중단된 상태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본지는 올해 연중 특별기획으로 ‘소설가 김별아의 경주 월성을 걷는 시간’을 연재한다. ‘신라 천년의 역사 현장’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월성을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와 그 속에서 명멸했던 인물들을 현대로 불러올 기사가 모두 20회에 걸쳐 독자들과 만나게 된다.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인 월성 현장 르포와 신라 역사 속 숨겨진 미스터리, ‘월성의 주인’이었던 왕과 여왕들, 석굴암과 황룡사지 등의 유적지 탐방이 게재될 것이다. 이번 특별기획은 2019년 오늘, 천 년 전 신라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만나는 유의미한 체험을 독자에게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경주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

불국사·석굴암·첨성대 알아도

천년 왕성 월성 잘 몰라

834년 동안 신라의 궁성

50명 왕들 통치의 ‘정청’

비밀의 열쇠 품고 경주로

밤차를 타면

아침에 내린다.

아아 경주역.

이처럼 막막한 지역에서

하룻밤을 가면

그 안존하고 잔잔한

영혼의 나라에 이르는 것을.

천년을

한가락 미소로 풀어버리고

이슬 자욱한 풀밭으로

맨발로 다니는

그 나라

백성. 고향사람들.

-박목월의 시 ‘사향가(思鄕歌)’ 중에서.

경주로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설렌다. 여행이든 일이든 목적과 별개로 귀향(歸鄕)의 감상이 깃들기 때문이다. 고향은 기억이자 그리움이며 사라진 시간에 대한 슬픔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가없는 막막함을 온몸으로 견디는 일. 시인이 꿈꾼 영혼의 나라는 어린 날의 안존하고 잔잔함을 지닌 그곳, 바로 고향이다. 긴장이 없고 겉멋이 없다. 딱딱한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 위를 걷는 대신 맨발로 이슬 자욱한 풀밭을 밟으면 족하다. 목월의 시 ‘사향가’가 수록된 시집 ‘난(蘭) 기타’가 출간된 1959년 무렵에는 서울에서 경주까지 하룻밤을 새워 달리는 야간열차가 있었나 보다. 현재는 청량리역에서 경주역까지 직통은 하루 2번 무궁화호로 운행되는데, 아침 7시38분에 떠나면 오후 1시23분에, 저녁 9시3분에 출발하면 새벽 2시18분에 경주역에 닿는다. 아, 새벽 2시18분의 경주역은 어떤 풍경일까? 어쩌면 그토록 낯선 시간의 경주를 그리는 데는 목월보다 동리의 심상이 맞춤할지 모른다.

나는 폐도(廢都)에서 태어났다. 나는 얼음장같이 차디찬 폐허를 밟고 무덤 속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자라났다. 나는 폐허 제단에 촛불을 밝히고 화려한 옛 꿈을 찾는 자다. 묵은 전통과 회구의 로맨티시즘은 내 오관에 흐르고 있다. 전통의 아들 폐도의 아들 이것이 나의 숙명이다. 나는 아모리 발버둥치고 애를 써도 이 묵은 전통의 옛 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리라. 내 머리 위에는 무거운 폐도의 총기(塚氣)가 누르고 있다.

-김동리의 소설 ‘폐도(廢都)의 시인(詩人)’ 중에서.

폐도, 그것은 ‘황성 옛터’다. 이애리수가 부른 노래의 ‘월색만 고요’한 황성(荒城)은 작곡가 전수린의 고향인 고려의 왕도 개성 만월대지만, 한때 영화를 누렸으나 지금은 황폐한 궁터라면 다 같이 ‘황성 옛터’일지라. 동리(東里)라는 이름 전에 스스로 동허(東虛·동방의 허)라는 이름을 지었던 청년 작가 김시종은 유년기의 상처를 고스란히 품은 허무주의자였다. 2009년 발굴된 단편 ‘폐도의 시인’은 등단작 ‘화랑의 후예’에 이어 발표된 두 번째 소설이며, 작가로서 발표한 첫 번째 소설이다.

대저 작가에게 고향은 애증(愛憎)의 대상이기 마련이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나고 자란 사오싱(소흥)을 배경으로 ‘공을기’를 비롯한 숱한 명작들을 쓰고도 때로 “신이 노하여 홍수로 쓸어가 버려도 좋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남루함을 깨닫는 청년기의 방황은 마침내 방황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고향에 대해 새롭고 풍부한 애정을 느끼는 밑천이 된다. 1950년대 서정주, 유치환, 박목월, 김상옥 등을 통해 한국문학을 휩쓸었던 신라정신이 절망 속에 방황하던 ‘화랑의 후예’들에게 자부심의 온기를 불어넣었듯이 말이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1935년의 김시종, 동리보다 동허에 가까웠던 작가는 치열한 분투 속에 ‘성장’해 1978년에는 자신의 연원인 고향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문예창작사에서 펴낸 수필집 ‘취미와 인생’에 실린 ‘나의 고향’에서 동리는 자신의 자랑거리로 두 가지 사실을 꼽는다.

“내 고향은 신라 천년의 서울로 누구나 알고 있는 경주다. 나는 늘 말한다. 나에게 자랑되는 것이 있다면, 첫째는 고향이 경주인 것이요, 둘째는 성이 김씨인 것이다.”

거대한 역사, 그것은 거대한 비밀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신라의 아득한 시간을 어루더듬는 일은 마치 먼눈으로 코끼리를 만지는 일과 같다. 이빨을 만지면 무 같이 생겼다 하고, 귀를 만지면 곡식을 까불 때 쓰는 키 같다 하고, 다리를 만지면 커다란 절굿공이 같다고, 등을 만지면 평상 같다고, 배를 만지면 장독 같고 꼬리를 만지면 굵은 밧줄 같다고 느낀다.

맹인모상(盲人摸象)의 우화를 온전히 적용하기는 무리하지만 지금껏 일반 대중이 배워 알거나 느껴온 신라, 혹은 경주는 일면 그런 식이었다. 첨성대, 석굴암, 불국사, 대릉원…. ‘수학여행지’이거나 ‘관광지’로 만난 경주의 첫 인상은 맥락 없이 나열되어 기억 속에 흩어져있기 일쑤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금관과 보검과 금 귀걸이는 휘황찬란하지만 유리벽 너머의 보물,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일 뿐이다. 이빨과 귀와 다리와 등과 배와 꼬리가 모두 코끼리의 일부임이 분명하지만 코끼리를 사실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처럼, 조각과 조각을 이어 맞춰 전체를 그려내는 일은 더디고 막연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비형랑이 하룻밤에 북천에 다리를 놓듯 도깨비놀음을 할 수도 없다. 기신기신 더디게 갈 수밖에 없는 길을 연구자와 예술가들이 조금씩 밟아왔다. 유물과 유적을 관광 상품으로만 여기는 맹목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눈을 떠 문화유산을 새로운 이해와 애정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기실 경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재요 보물이다. 코끼리의 본질을 꿰뚫어 한눈에 그려낼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한 바에야 일부라도 더듬어 그 신비를 상상함에 감복한다. 그렇다면 코끼리를 가장 코끼리답게 했던 시발점이자 중심은 어디에 있을까?

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935년까지 992년 동안 한반도 동쪽과 남쪽 지방을 통치했던 고대국가 신라는 서라벌, 즉 경주라는 빛나는 도읍과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서라벌 사람들, 그중에서도 왕국의 주인인 왕족들은 첨성대에서 별을 보고, 석굴암과 불국사에서 기도하고, 죽어 대릉원에 묻혔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살았을까?

신라의 천년 왕성은 월성(月城)이다. 월성은 파사이사금 때인 101년부터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 834년 동안 신라의 궁성이었다.

56대 왕들 중 왕궁 건설을 직접 주도했지만 오래 거주하지는 못한 5대 파사이사금을 제외하면 6대 지마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 50명의 왕들이 살았던 곳이자 통치의 정청(政廳)이었으며 왕조국가 신라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고도 야릇하다. 경주를 찾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첨성대와 불국사와 석굴암은 알아도 월성을 모른다. 학창시절 배웠던 역사 교과서에도 없었다. 월성지는 실제로 천 년이 넘도록 궁성의 흔적조차 없이 완벽한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대릉원, 황룡사, 남산, 첨성대 등이 월성을 둘러싸듯 자리 잡고 있음에도 정작 그 알짬이 없다. 삶터를 외면한 채 무덤과 기도처와 천문대 따위만 들추고 다녔던 게다. 이토록 기이한 부재(不在)와 묵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2000년 12월, 유네스코(UNESCO)는 경주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석굴암·불국사(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종묘(1995), 창덕궁(1997), 수원 화성(1997)에 이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갖고 있는 부동산 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유적의 성격에 따라 나뉜 남산지구, 월성지구, 대릉원지구, 황룡사지구, 산성지구 등 5개 지구 가운데 월성지구는 국보 제31호인 첨성대를 비롯해 김씨 왕조의 시조인 알지가 태어난 계림(사적 제19호), 왕궁의 별궁으로 짐작되는 동궁과 월지(사적 제18호), 그리고 왕성인 월성(사적 제16호) 등을 포함한다.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지정문화재인 월성은 신라의 궁성지로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무궁하다. 그럼에도 월성에 대한 조사는 빈약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1910년대 일본인들에 의한 조사로 성벽과 주변 상태가 파악되었고, 1979~1980년 동문지에 대한 조사와 1984~1985년 시굴 조사를 통해 해자의 존재와 건물지 여부가 확인되었다. 1985년부터 2010년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주관으로 3기에 걸쳐 실시된 발굴 조사 중, 2007~2008년 최초의 전면적 지하 레이더 탐사를 통해 생생한 유구의 존재가 마침내 드러났다. 천년 동안 잠들어 있던 월성을 깨우는 일은 달걀 섬 모시듯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월성이 속살을 드러낼수록 정비든 복원이든 개발이든 설정한 계획은 계획대로, 고고학자를 비롯한 연구자들의 고민은 고민대로 깊어진다. 무엇이 역사에 대한, 시간과 사람과 삶에 대한 진정한 예의일까?

“삼국 시절에 났나, 말은 굵게 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은 정말 굵직굵직한 큰소리로 천하를 호령했었나, 미력한 후대에게는 공연히 큰소리치며 허세를 부릴 때 퉁바리를 주는 쓰임으로 남아버렸다.

사뭇 말하기에 조심스럽다. 하지만 월성을 빼고는 신라를 이야기할 수 없다.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그럴 것이 확실하다. 앞으로 이어질 연재에서는 월성의 현재였던 우리의 과거, 우리의 현재인 월성의 미래, 그리고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끝없이 새로워질 월성의 시간들을 남은 문헌과 현재까지의 발굴조사, 사람과 상상력을 통해 살피고자 한다. 한계가 번연하기에 두려운 일이다. 영화의 천년과 폐허의 천년이 다시 흐른 뒤, 다만 지금 여기에서 알고 느끼고 깨닫는 편린을 기록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람되이 가슴이 뛴다. 신라와 서라벌에 대해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아는 듯하지만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그리하여 월성이라는 비밀의 열쇠를 품고 경주로 향하는 마음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과 여전히 모르는 것들 앞에 달떠 두근거린다.

코끼리야, 온전한 너를 만나고 싶다!

 

 

 

소설가 김별아는 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2005년 장편 ‘미실’로 1억 원의 상금이 걸린 제1회 세계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집 ‘꿈의 부족’, 장편소설 ‘채홍’ ‘탄실’ ‘구월의 살인’, 산문집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스무 살 아들에게’ ‘도시를 걷는 시간’ 등의 책을 냈고, 의암주논개상과 허균문학작가상 수상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