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동면(冬眠)에 들어간 반달곰은 무술년이 기해년으로 바뀐 것을 알고 있을까.

어제 떠오른 태양과 내일 떠오를 태양은 하나임에도 새해 일출 여행객은 줄어들 기색이 없다.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무리지어 동해안으로 출정하게 하는가?! 오며가는 누추하고 피로한 여정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도록 하는 흥분제 성분은 무엇인가. 미련일까, 회한(悔恨)인가 그도 아니면 신년에 거는 다대한 꿈과 기대일까.

구랍 31일 동료교수의 반가운 전화를 받는다. 무겁지 않은 덕담과 회고 끝자락에 그의 모친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얘기를 듣는다. 여든한 살 연세에 걷지 못한다는 전언(傳言)은 사뭇 무겁게 들려왔다. “고관절이 안 좋아서 늘 누워만 계세요.” 문득 85세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골골하지만 아직은 경로당 출입이 자유로운 어머니. “밥 지을 사람 없어서 경로당도 문 닫게 생겼어야.” 명석한 총무로 성가(聲價)를 올리는 모친의 걱정스런 목소리.

나이든 사람에게 암보다 치명적인 상황은 걷지 못하는 것이다. 걷는 데 문제없는 사람은 이 말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 나도 아툴 가완디의 서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 Being Mortal>를 읽었을 때조차 그것을 알지 못했다. “자기 마음대로 화장실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당신은 몰라요!” 서책에 나오는, 걸을 수 없게 된 할머니의 말이다. 극심한 위통(胃痛)에 시달리다 한밤중에 찾아간 응급실에서 사태의 진실과 대면했다. 내가 누운 침상 맞은편에 70초반의 남성이 누워있었다. 링거와 투석기를 꽂은 채 익숙한 자세로 누워있던 그이. 잠시 뒤에 견디기 어려운 악취가 풍겨져 나왔다. 그렇다. 그가 누운 채 기저귀에 대변을 날린 것이다. 여기저기서 낮은 비명과 코를 움켜잡는 인총의 종종걸음이 들리고 보인다. 하지만 어쩌랴?! 그는 이미 걸을 수 없는 중환(重患)의 몸이었으니.

어쩌자고 저런 몸이 되었을까, 생각한다. 생각하다 나를 돌이키니 같은 꼴이다. 걸을 수 있는 다리 유무(有無)의 차이만 있을 뿐! 젊어서 육신과 영혼을 소진하다 못해 질탕하게 날려버린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백지 한 장 차이 아닌가! 온몸에 소름이 돋고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하다. 잠시의 희열과 광기에 휩싸여 날려 보낸 술잔과 희떠운 허언(虛言)과 육체의 기진상태를 자초했던 청춘시절. 그 결과 찾아든 칼로 찌르는 위통. 어릴 적부터 들어온 ‘지덕체’ 삼위일체가 이젠 우습게 느껴진다. 지식을 선두에 두고 몸을 꼬리에 두는 어리석음이 한눈에 보인다. 몸이 부실하거나 부재하면 지식 역시 탐탁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다. 몸의 손상과 정지는 지식의 손상과 멈춤을 유발한다. 그러나 지식의 부재나 작동불능 상태에도 몸은 스스로 거동하고 작동한다. ‘의식주’가 아니라 ‘식주의(食住衣)’가 되어야 하는 이치와 동일하다. 관념의 수인(囚人)으로 살아온 구시대 유습의 자취가 완연하다.

요컨대 “건강한 육신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법!”.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스스로 설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요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자립(自立)이란 어휘는 두 발로 꼿꼿하게 대지를 딛고 하늘과 태양을 떠받치는 형상이다. 타자의 도움 없이 제 발로 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자립이다. 강자들의 시선과 언동에 구애받음 없이 당당하고 의연하게 갈 길을 선택하는 것이 자립의 근본이다. 지난해 남과 북, 북한과 미국은 적대행위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관계설정에 합의했다. 그것은 남과 북의 자립과 역량에서 출발한다. 홀로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의 초입(初入)에 도달한 원년이 무술년 2018년이다. 기해년을 맞으며 나는 자립과 선택적 역량강화를 희망한다. 누워서 민폐를 끼치는 사회와 국가가 아니라, 두 발로 꼿꼿하게 자립하면서 주위에 광명을 던지는 화사한 청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