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문화의 정체성 탐구와 창조적 브랜드화를 중심으로

배용일(포항1대학 초빙교수)

이 글은 배용일 초빙교수(포항1대학)께서 지난 10월 8일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된 제7회 일월문화제 기념 ‘제1회 포항정신문화 학술심포지엄’(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일월사상)에서 발표한 주제 논문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 연구 -포항 정체성 탐구와 포항문화브랜드화를 중심으로- ”를 요약한 것이다.(각주는 지면 관계로 생략) /편집자 註

머리말

포항지역의 연오랑 세오녀(延烏郞細烏女) 일월신화(日月神話)는 단군신화를 수록하여 유명한《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어 일찍부터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최남선이 단군신화는 한국문화 일체의 종자라고 했듯이 연오랑 세오녀 신화는 포항문화 일체의 종자이며 원형질이다.

지금까지 ‘연오랑 세오녀 설화’라고 일컬어 온 것을 2007년 포항의 문화제 명칭을 영일만축제에서 이번 제7회 ‘일월문화제(日月文化祭)’로 개칭한 것을 기념하는 ‘제1회 포항정신문화 학술심포지엄’ 개최를 계기로 ‘연오랑 세오녀 신화’로 명명하였다. 그 이론적 근거는 본고의 지리적 배경, 역사적 배경 및 신화적 구조를 통해 구명하였다.

이번 연구에서 연오랑세오녀가 실존 인물임을 밝히는 귀중한 사료를 발견하여 포항 정체성 탐구에 큰 전기를 맞으며, 일월신화 1850년의 신비로운 베일을 한 겹 벗길 수 있게 되었다.

이 논문의 궁극적 목표는 연구 결과 얻은 포항문화의 정체성을 브랜드로 상징화하여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와 일월사상의 창조적 가치를 재창출하는데 큰 뜻을 두었다.

Ⅰ.연오랑 세오녀 사료

연오랑 세오녀 신화 연구의 가장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는 《삼국유사》의 ‘연오랑(延烏郞)세오녀(細烏女)’와《영일읍지》의 ‘세계동(世界洞)’의 내용을 소개한다.

1.《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제 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부부로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미역 종류〕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한 바위 -혹은 한 고기라고도 한다-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이는 비상한 사람이다.」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일본 제기(帝紀)를 살펴보면 전후에 신라 사람이 왕 된 이가 없으니, 이것은 변읍(邊邑)의 소왕이고, 진왕(眞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는 그 남편이 돌아 오지 않음을 괴이히 여겨 가서 찾다가, 남편의 벗어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또한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세오〕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지니, 일관(日官)이 말했다.「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 나라에 있었던 것이 지금 일본으로 가버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왕은 사자(使者)를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다. 연오는 말했다.「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거요.」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그런 후에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며,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三國遺事》권1, 紀異, 원문생략)

2.《영일읍지》의 ‘세계동’

예로부터 세곡이라 부르다가 후에는 누을(또는 혜곡)이라고 불렀다. 세 구역(원신흥·중흥·세계)을 합하여 세계동이라고 했다. 신라 아달라왕 때 영오랑·세오녀가 세계동의 못둑 위의 들에 집을 지어 살았던 곳이나 지금은 빈터만 남았다. 남쪽에는 춘덕보가 있어 일월지로 통하고, 동쪽에는 순제가 있어 앞들에 물을 대고, 북쪽에는 옥령이 있고, 서쪽에는 도덕곡이 있다.(金鎔濟,《迎日邑誌》권1 ‘世界洞’ 원문생략)

《삼국유사》에서는 연오랑(延烏郞)이라 했으나《영일읍지》는 연(延)자를 영(迎영)자로 써서 영오랑(迎烏郞)이라 다르게 표기했다. 그러나 ‘연(延)’과 ‘영(迎)’은 음과 훈이 흡사하여 조선시대에는 영일현(迎日縣)과 연일현(延日縣)을 혼용해 온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같은 명칭이다.

《영일읍지》‘세계동’에서는 영오랑 세오녀가 집을 짓고 살았던 세계동 마을과 주위의 못·재·골짜기 등 구체적인 지형적 환경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일월지와 제천지(祭天地) 및 연오랑세오녀 거처를 비정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하여 당시 부부의 신분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세계동〉의 마을명과 주변의 못·재·골짜기의 명칭이 지금까지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동국여지승람》의「일월지 못 위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은 일월신화의 발생지역을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단서가 되고 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세오녀 신화는「동해 바닷가에 사는 해와 달의 정(精)인 연오랑세오녀가 바위를 타고 일본에 건너가 그곳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도일(渡日) 건국 사실이 자연환경의 지역성과 고대 신라왕국 성립기의 역사성을 토대로 상징화된 것이다. 즉, 당시 전개되었던 근기국(勤耆國)의 신라로의 편입, 선진문화의 일본전파 및 신라와 일본과의 문물교류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화한 것으로 추단된다.

특히 일월신화(日月神話)의 탄생지를 에워싼 여러 지명들과 이 지역의 가장 빠른 연중 일출시각 등은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포항지역만이 일월신화의 정체성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