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엊그제 달력을 넘기다보니 허전하고 쓸쓸하다. 마지막장 달력에 새겨진 ‘12’가 크게 다가온다.

‘어이쿠, 또 한 해가 가는구먼!’ 해마다 연말이면 예외없이 터져나오는 탄성(歎聲)이다. 그렇게 다시 세월이 가고 스스럼없이 나이의 문턱을 넘는다. 구렁이가 담 넘어가는 것을 본 일은 없지만, 시간에 편승해 퍼런 녹이 슬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백두(白頭)의 계급장을 단 것은 꽤나 오래 전 일이다. 차마 부끄러운 일이다.

각설하고, 엊그제 한국인의 ‘행복도’ 조사결과가 언론에 발표됐다. 2018년에 유엔에서 내놓은‘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5.87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32위라 한다. 더욱이 2012~2015년 세계인의 행복도 조사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157개국 가운데 96위를 기록했다. 부자 나라들과 비교해도 불행하고, 가난한 나라들과 견줘도 행복하지 못한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왜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근원은 어디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들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유학시절에 거리나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 “안녕하세요” 대신에 “행복하시죠?!” 하고 묻곤 했다. 익숙한 인사를 대체하는 낯선 방식에 대부분 당황해했다. 그런 인사를 받은 적 없었다는 게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표정의 그들을 보면서 내심 만족스러웠다. 행복을 구하고자 만리타국에 나와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현자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을 ‘부족함’에서 찾았다고 한다. 재산과 외모, 말솜씨와 체력, 명예같은 덕목에서 완전함이나 채움이 아니라, 다소 부족한 상태가 행복의 원천이라는 얘기다. 허다한 한국인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까닭은 더 많이, 더 높이, 더 멀리를 욕망하는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적빈(赤貧)과 질병과 불화로 괴로운 분들도 물론 적잖을 터이지만.

‘도덕경’ 44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갈 수 있다.”

태상노군은 이런 결론의 전제를 명예와 육신, 육신과 재화 가운데 어느 것이 소중한가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여러분은 건강과 명예, 돈 가운데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가?! 결론은 자명하다. 육신을 버려두고 탐하는 모든 것은 한낱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과욕의 희생양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

열흘 넘게 위장의 통증에 시달리면서 문득 깨달은 것은 젊은 시절 스스로 탕진하고 소진시킨 육신의 건강이었다.

불철주야 주구장창 불태운 영혼과 육신이 고갈되면서 여기저기 수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업자득, 자승자박, 인과응보, 사필귀정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 제공자는 나 자신이다. 원인은 필시 괴수(怪獸) 리바이어던의 크기를 능가하는 거대한 탐욕의 깊고도 너른 뿌리의 활착(活着)일 것이다.

최인호 ‘상도’에는 임상옥의 ‘계영배(戒盈杯)’가 나온다. 계영배는 ‘가득참을 경계하는 술잔’이다. 자신의 욕망을 경계하고자 했던 임상옥은 그 결과 조선최고의 장사치가 된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三毒) 가운데 하나를 올바르게 징치하고 경계할 때 행복은 어느 결에 우리 곁에 자리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하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