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몽골과 송수권 시인

▲ 몽골 초원에선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소원을 비는 ‘어워’를 볼 수 있다. 한국의 서낭당과 비슷하다.

‘몽골’이란 단어를 발음할 때면 어디선가 풀꽃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실제로도 몽골은 초원의 나라다. 그 너른 풀밭에서 유목하는 것으로 대다수 국민들이 생계를 유지한다. 떠돎과 유랑이 보편적인 국가.

수도인 울란바토르(Ulan Bator)의 풍광은 아시아의 보통 대도시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늘어선 상가와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가게, 양고기 구이와 몽골 특산 보드카를 파는 카페와 식당들….

몇 해 전. 기자는 시인과 소설가가 대부분이었던 여행단에 끼어 몽골을 찾았다. 낮에는 박물관과 몽골의 대학을 찾아 세미나와 회의를 진행했고, 어둠이 내리면 ‘술 좋아하는’ 몽골 사람들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매일 같이 폭음을 했다. 무색무향의 독한 술 보드카는 기름진 고기 안주와 썩 잘 어울렸다. 한때는 지구의 1/3을 지배했던 원나라의 후예들은 그들 선조인 칭기즈칸과 쿠빌라이칸처럼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졌다.

며칠이 지나니 울란바토르 도심을 벗어나고 싶었다. 갑갑함이 일탈 욕구를 불러들인 것. “내일은 회의에 빠지고 교외로 나가보자”는 한 사람의 은밀한(?) 제의에 몇몇이 웃음으로 동의를 표했다.

▲ 바위산이 만들어내는 웅장한 풍광이 여행자를 유혹하는 몽골.
▲ 바위산이 만들어내는 웅장한 풍광이 여행자를 유혹하는 몽골.

▲ 신성한 돌무더기 ‘어워’를 보며 떠올린 연애시

조그만 차량을 이용해 울란바토르 시내를 빠져나왔다. 확 트인 풍경에 가슴부터 시원해졌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이름 모를 꽃과 풀의 냄새가 자연스레 청춘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햇살 눈부신 풀밭에서 연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달콤한 사랑노래를 흥얼거리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 그때 우리는 조그만 희망에도 환하게 웃었고, 이루지 못한 작은 열망에도 크게 슬퍼했다. 너나없이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살았다.

이제는 아득해진 과거를 떠올리던 그때, ‘어워’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워는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소원을 비는 몽골의 서낭당이다. 초원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 돌무더기는 내비게이션(navigation)이 보편화되지 않은 몽골에서 이정표 역할도 해준다.

대체 어디서부터 걸어온 것일까? 70대로 보이는 노파가 어워에 돌 하나를 올리고는 주위를 세 바퀴 돈다. 동행했던 몽골인이 조용하고 나직한 말투로 알려줬다.

“우리나라에선 이게 소원을 비는 형식”이라고.

할머니는 무슨 소원을 이루려고 홀로 인적 없는 먼 길을 터벅터벅 걸었을까? 불현듯 ‘남도의 김소월’이라 불리는 송수권(1940~2016)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명징하고 올곧은 역사의식과 능수능란한 구어체로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새긴 송수권 시인.

자신과 함께 존재하는 자연과 타자의 본질을 누구보다 절절하게 노래한 그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따스하게 껴안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게 시인의 마음이다.

‘죄 없이 떨어지는 꽃잎’에서 연인의 모습을 보고, 애타는 마음 전하지 못한 채 돌아서 울어본 사람은 안다. ‘석남꽃 꺾어’가 얼마나 아픈 시(詩)인지를. 그러나 시는 아픔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데 없이’ 피는 세상 가장 아름다운 석남꽃을 들고 ‘밤이슬에 옷자락 적시며 네게로 가겠다’는 구절엔 누구도 함부로 멸하지 못할 사랑이 오롯이 담겨 우리를 울린다.

석남꽃 꺾어 /송수권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그릇 마주 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데 없이
겁도 없이 남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 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들고
밤이슬 풀 비린내 옷자락 적시어가며
네 집에 들리라.
 

▲ 몽골 여행에선 말에 올라 초원을 달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 몽골 여행에선 말에 올라 초원을 달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 할머니의 ‘소원’과 우리의 ‘사랑’은 같은 무게가 아닐지

어워 주위를 돌며 간절히 무언가를 빌던 몽골 할머니의 가슴 안에도 분명 사랑이 존재했을 터. 사물에 대한 애정 없이는 희망과 열망이 생겨나지 않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송수권 시인과 우리 일행, 할머니 모두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사랑을 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막막한 초원이나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전생(前生)’을 믿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과학과 합리가 아닌 꿈과 신화(神話)에 기대고 싶은 게 인간이다. 끝을 짐작하기 힘든 드넓은 풀밭과 깎아지른 절벽, 말을 타고 달리는 소년과 몽골식 천막을 보고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길. 흔들리는 자동차 안에서 아래와 같은 졸시를 끼적였다. 내 안의 ‘막막함’이 불러온 문장이었다. 타클라마칸(Taklimakan)은 몽골에서 가까운 사막이다.

타클라마칸 혹은, 전생의 기억

취한 눈에겐 세상이 오렌지빛
거울을 올려다보면 언제나처럼 내가 낯설다
집밖에서 만난 가족에게 품은 살의
생은 분홍 리본 묶인 선물상자가 아니다
타클라마칸의 양들은 끔찍한 기억 속을 산다

열정이 부재한 시처럼 구차한 육체
손목이 가는 여자에서선 더운 밥 냄새가 나고
모래 섞인 바람이 지배한 사막
길 위에서 길을 찾다 길에 누우면
이미 나를 용서한 하늘엔 거짓말 닮은 별이 총총

낙타의 눈에 깃든 막막한 암흑
이곳엔 오아시스가 없다
가난하고 짧은 사랑 서너 번이 이울면
이윽고 황혼으로 치닫는 생
돌이킬 수 없는 그 밤들 사이로
전생의 아내가 울음도 없이 걸어온다.
 

▲ 푸른 초원 위에 몽골식 텐트 ‘게르’가 세워져 있다.
▲ 푸른 초원 위에 몽골식 텐트 ‘게르’가 세워져 있다.

▲ ‘전생’과 ‘사랑’에 관한 생각으로 밤은 깊어가고…

불어오는 바람에 풀꽃 흔들리는 초원에서 네온사인 환한 도시로 돌아온 우리는 그날 밤 늦도록 어워 앞에서 두 손을 모으던 몽골 노파와 전생,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내 전생은 중앙아시아 풀밭을 뛰놀던 야생마였을 것”이라는 농담으로 좌중을 웃겼고, 그리움과 기다림의 고통에 관한 소설을 써온 한 작가는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다”는 공안(公案) 같은 문장을 읊조리기도 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술자리를 파하고 잠을 청하러 모두가 자기 방으로 돌아간 시간. 자정을 넘긴 캄캄한 울란바토르 거리를 홀로 거닐었다. 머리에서 생겨난 세 가지 궁금증이 가슴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간절한 표정으로 돌무더기 주위를 돌던 할머니는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전생의 나는 누군가의 손가락질을 받던 악인은 아니었을까? 마흔을 넘긴 사내에게도 가슴 설레는 사랑이 다시 찾아와줄까?”

모두 대답을 찾기 힘든 어려운 질문이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구창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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