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교육의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우리글을 깨우치지 못한 시민들의 수가 엄청났다.

이들에게 문해학교인 애린공민학교를 자신의 집에 설립해 운영했다. 이 학교를 거쳐 간 시민이 수천 명이었다.

또 주변의 폭력과 괄시에 시달리다 못해 도움을 요청해 온 흥해 음성 한센인들의 후견인이 돼 이들의 선한 이웃이 돼 주었으며 애도농장과 애도교회 설립을 주선했다.”

애린복지재단,
인간 상록수 재생 이명석 선생
일대기 출간
선생의 생애·활동·업적
생생한 증언·사진과 함께 실어

포항지역에서 문화예술의 씨를 뿌리내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이웃사랑을 실천한 선각자.

재생 이명석(再生 李明錫·1904∼1979) 선생의 평생 동안 자기 희생을 통해 기독 정신을 실천한 일대기를 담은‘재생 이명석’(새암출판사)이 출간됐다.

‘재생 이명석’은 평생을 선린(善隣)·애린(愛隣)의 정신으로 일제감점기와 6·25 전쟁을 통해 피폐하고 암울했던 포항 지역사회의 등불이 되어준 한 지도자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재)애린복지재단(이사장 이대공)은 설립 20주년을 기념해 그의 삶과 정신을 공유하기 위해 펴냈다.

▲ 1970년대 구호품을 가지고 선린애육원을 방문한 미군을 환영하는 이명석 선생.  /애린복지재단 제공
▲ 1970년대 구호품을 가지고 선린애육원을 방문한 미군을 환영하는 이명석 선생. /애린복지재단 제공

책은 6·25 전쟁 후 전쟁고아들을 위한 선린애육원 설립과 운영에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애린공민학교를 설립해 전쟁 중 학업의 기회를 놓친 청소년들에게 문해교육을 실시했고, 어려움에 처한 성곡마을 한센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정착촌 마련을 도왔으며 또한 포항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하며 오늘날 포항 문화예술의 토대를 마련한 재생 선생의 활동과 정신을 자료와 함께 싣고 있다.

▲ 재생 이명석 선생 문화공덕비 제막식에 참석한 이대공 이사장과 문인들. 1998년. /애린복지재단 제공
▲ 재생 이명석 선생 문화공덕비 제막식에 참석한 이대공 이사장과 문인들. 1998년. /애린복지재단 제공

재생 선생은 1904년 경북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에서 이규조 옹과 방구 여사에게서 태어났다. 끼니 해결이 어려울 정도로 집안이 어려웠지만 부친이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신앙을 통해 힘을 얻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삼사리에서도 한참이나 먼 장사리의 양성교회에서 운영하는 장사학교에서 한글 해득을 한 소년 이명석은 그림에서 남다른 소질을 보이며 교사들의 눈에 띄었던 모양이었다. 교사들의 칭찬은 소년 이명석을 더 넓고 큰 세상으로 이끌었다. 소년은 단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열두 살에 집을 떠나 포항을 거쳐 대구로 갔다.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장사학교 선생님이 알려준 사립학교를 찾아갔지만 일제에 의해 폐교된 것을 알게 되고 실망하게 된다.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찾아갔으나 자리가 없었고 몇 군데를 더 알아봤으나 명석을 받아주는 데는 없었다. 명석은 일단 대구 지리도 익힐 겸 해서 서문시장과 약령시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았다. 작은 심부름에서 물건 배달까지 힘든 삶의 아픔을 일찍 겪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4년 후 열일곱 살 되던 1921년 9월 명석은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한 사설 강습소인 교남학원 중등과에 등록한다. 입간판 만드는 일 등 학교일을 보면서 공부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명석은 중등과와 고등과를 합쳐서 4년 과정을 마친다. 1925년 큰 꿈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명석은 간사이 미술원에 입학해 미술을 전공하고 스물세 살이 돼 고향에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논밭으로, 바다로 나가서 일을 시작한다.

▲ 미해병 장병들, 선린애육원생들, 이명석 선린애육원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직원들.  /애린복지재단 제공
▲ 미해병 장병들, 선린애육원생들, 이명석 선린애육원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직원들. /애린복지재단 제공

당시로서는 큰 고을이었던 영해 원황마을 원황교회 도달석 집사의 장녀 도우술과 결혼한 명석은 1933년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해 도회지인 포항으로 이사한다. 낯선 곳 포항에서는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명석은 가족을 포항에 남겨두고 다시 일본으로 떠난다.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지만 명석은 공장 굴뚝이 무너지는 큰 사고로 다치게 돼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곳에서 결핵이라는 병마에 시달리는 바람에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다.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건강도 회복하게 된 명석은 페인트 일을 하게 된다. 색깔을 만들어 내는 일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명석은 일본인들의 주택 벽면이나 창틀 페인트 작업을 간판직업으로 삼았다. 일을 잘 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부두로 나가서 선박 도색 작업까지 작업 범위를 넓혀 나갔다. 그러던 중 1938년 대구일보 기자로 포항에 온 박영달과 포항읍사무소 앞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김대정을 만나게 된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나름대로 식견을 갖고 있던 이들이었다. 명석은 그들과 의기투합해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일제에 억눌린 문화운동을 민족 계몽운동으로 이어가기로 했다. 포항교회(현재 포항제일교회)에 등록한 명석은 일제강점기 강압적인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정책을 온몸으로 견뎌냈으며, 포항제일교회 청년들로 관악대를 조직해 농촌 계몽운동과 피폐된 식민지 농어민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포항에서 유일하게 남았던 포항제일교회를 찾아온 미해병 군목과 협의해 선린애육원과 재단 설립을 주도해 부모를 잃고 거리를 떠도는 고아들을 돌보았다. 특히 재단의 공공성을 갖추기 위해서 당시 포항을 대표하던 5개 교회가 참여하도록 정관을 만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교육의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우리글을 깨우치지 못한 시민들의 수가 엄청났다. 문맹자로 전락한 그들의 생활은 불편하기도 했지만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한 직업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해방과 전쟁은 끝이 났지만 문맹자를 도울 수 있는 정부의 대책도 요원한 지경이었다. 이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만들어주는 바탕을 마련해 주기 위해 문해학교인 애린공민학교를 자신의 집에 설립해 운영했다. 이 학교를 거쳐 간 시민이 수천 명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주변의 폭력과 괄시에 시달리다 못해 도움을 요청해 온 흥해 음성 한센인들의 후견인이 돼 이들의 선한 이웃이 돼 주었으며, 애도농장과 애도교회 설립을 주선했다. 더욱이 이들이 정부 지원금을 받아 정착해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국유지 불하의 어려운 법적 절차까지 지원했다.

▲ 애린공민학교 건축현장 및 이명석 원장이 직접 쓴 상량문(오른쪽). 1954년.  /애린복지재단 제공
▲ 애린공민학교 건축현장 및 이명석 원장이 직접 쓴 상량문(오른쪽). 1954년. /애린복지재단 제공

6·25 이후 지역민들에게 일제 강점기와 전쟁에 따른 정신적 상흔들이 가슴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치유하고 시민들 삶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길은 문화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문화원 설립을 주도해 지금의 포항문화원을 설립했으며 포항 최초의 문화제인 ‘개항제’를 4회까지 운영했다. 예술 단체가 전무하던 시절, 포항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예술인들의 구심점이 돼 그들의 활동을 지원 육성했으며, 부지런히 후학들을 길러냈다. 그들 중에 화가 권영호, 김두호가 있으며, 문학가로는 손춘익, 박이득, 연극에는 신상률, 김삼일 등이 선생의 정신과 뜻을 잇고 있다. 오늘날의 포항예총도 재생 선생이 놓은 주춧돌 위에 쌓아올려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60년 초 독서운동과 도서관 설립 운동을 시작했다. 미 해병으로부터 임대한 퀀셋에 시립 도서관 이름을 걸고 시민들에게 독서 활동을 장려했다. 이때 대부분의 장서는 재생 선생의 집에 있던 책을 기증한 것이었다. 이 일이 기반이 돼 시립서경도서관이 세워질 수 있었으며 오늘날 시립포은도서관의 모체가 됐다. 재생 선생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비극의 뼈아픈 시련을 몸소 겪으면서도 예수님의 이웃 사랑 정신을 실천하고 문화예술 부흥을 통해 인간다움을 실현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인간 상록수 훈장을 받았고 1998년에는 포항지역 문인들이 뜻을 모아 선생이 생전에 자주 찾던 포항시 북구 수도산 덕수공원에 문화공덕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이번에 발간된 책에는 재생 이명석 선생의 이 같은 생애와 활동, 신심과 업적, 일제강점기와 6·25 전후의 현실 등을 알려주는 재생 선생의 활동상과 사진들이 실려 있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문맹과 가난에 허덕였던 우리나라 사정도 볼 수 있다. 특히 85가지의 각주가 달릴 만큼 충실한 자료와 생생한 증언에 따른 기록으로 재생 선생의 활동과 함께 당시의 포항 지역 사정까지 읽어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는 책이다.

▲ 이명석 선생이 정부로부터 받은 인간 상록수 훈장.  /애린복지재단 제공
▲ 이명석 선생이 정부로부터 받은 인간 상록수 훈장. /애린복지재단 제공

이대공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은 “아버지는 가난한 이들의 이웃으로 평생을 사셨던 분이며,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혼란기를 거치며 시민들이 가졌던 상처 난 마음을 문화라는 손길로 다독여 주셨던 분”이라며 “그런 삶과 정신은 기독교 신앙에 따른 것이며 바람이 있다면 아버지의 선린과 애린 정신이 오늘날 포항시민들의 삶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라고 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재생 이명석 선생 연보

1904년 영덕 강구면 삼사리 출생
(부 이규조, 모 방구)
1913년 장사학교 한글 수학
1916년 포항을 거쳐서 대구로 공부를 위해 집을 나섬
1921년 교남학원 입학
1924년 대구교남학원 중등, 고등과정 4년 수료
1925년 일본으로 출국
1925년 일본 관서미술원 입학
1927년 관서미술원 휴학
1927년 귀국, 부모님 밑에서 농업
1928년 결혼 (영해 원황교회 도우술 1912년생)
1932년 1남 진우 출생
1933년 포항 상원동 이주
1934년 일본 재 출국
1935년 1녀 딸 매리 출생
1935년 귀국
1936년 8월 2일 삼사교회에서 포항제일 교회로 이명(移名) 당회 결의
1937년 12월 26일 포항제일교회 서리집사
1938년 2남 태우 출생
1939년 일제의 강제적인 포항 기독교 신사참배 행사를 무산시킴
1941년 3남 대공 출생
1941년 창씨개명으로 일제 저항
이진우(쯔끼시로 오오히로 / 月城大仁),
이매리(쯔끼시로 매리 / 月城梅理)
이태우(쯔끼시로 오오쿠니 / 月城大國),
이대공(쯔끼시로 오오기미 / 月城大公)
1945년 해방, 도서 대본소, 간판 및 페인트 가게 운영
1946년 포항문화협회 조직
1948년 3월 21일 장로 피택
1949년 당회에 질병으로 인한 장로시취(試取) 연기 요청
1950년 6.·25 전쟁 동안 오천읍 진전으로 피난
1950년 전쟁 참화로 집을 잃음 (상원동 260-5번지 육거리 하나은행 자리)
불타고 남은 도서는 서경도서관이 생길 때 기증
그 후 도로정비로 인하여 대토
1950년 10월 22일 장로장립결의
1950년 애린 공민학교 운영
1950년 11월 제일교회 장로 장립 예배
1951년 포항후생주택조합장
1952년 12월 선린복지재단 2대 이사장
1952년 애린성경구락부 설립 운영
1953년 9월 선린복지재단
임시 이사회 의장을 맡아서
복지재단 설립 의결 및
정식 인가 등록
1955년 애린공민학교 설립 운영
1956년 성곡동 음성 한센병 환자 지원,
애도원, 애도교회 지원 및 작명
1958년 선린애육원 제4대 법인 이사장
1961년 포항문인협회 창립
1963년 미인가 한국예총포항지부장
1963년 포항기독청년회 창립
1964년 4대 선린애육원 원장
1964년 연일교육재단 분규 수습위원장
1965년 사단법인 포항문화원 원장
1965년 이진우 검사의 도움으로
애도원 정착 지원금 신청
1966년 애도원 정착을 위한 토지 구입 성사
1966년 『재생』이라는 아호 사용
1966년 포항의 첫 문화제인
「포항개항제」운영
1970년 2월 문화원 부설 독서회 조직
1970년 애도원 보조 (매월 2,000원)
제일교회 당회 결의
1975년 3월 포항제일교회 원로장로 추대
1979년 4월 5일 2남 거주하는 미국 여행
1979년 9월 28일 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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