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얼마 전 서울교육청에서 두발 자유화와 편안한 교복 방안을 발표했다. 머리털 길이는 물론이려니와 파마와 염색도 허용하겠다는 것이 두발 자유화의 골자다. 아울러 학생들의 불평과 원성의 대상인 교복도 자라나는 학생들의 신체에 적절하고 편안하도록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이것을 두고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에는 수많은 전문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육과 의료, 아파트 세 영역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강호제현들이 가공(可恐)할 신공을 펼치며 군웅할거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강호제현이 관여하려는 분야가 점입가경 확대일로를 걷는다는 점이다. 청년실업, 노인복지, 낙태문제, 남녀혐오, 신도시와 그린벨트 해제, 국민청원을 둘러싼 찬반양론 등등. 이렇게 대단한 나라의 공복(公僕)으로 ‘감위천하선’하는 분들의 노고가 새삼 대견스러운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교복폐지와 두발 자유화를 주장해왔다. 교복은 제복이며,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통제와 억압의 기표(記標)다. 군대와 감옥과 학교의 차이가 있는가?! 같은 제복을 입고, 같은 시각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전원 통제하는 일방향 감시체제의 공간이 학교와 감옥 그리고 군대다. 그런 곳에서 자유로운 영혼과 미래의 꿈과 희망을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제되고 획일적인 일상이 무반성적으로 되풀이되는 전체주의적 공간! 한국 중고교교육은 대입이라는 하나의 과녁으로 수렴돼있다. 확고부동하고 유일무이한 최종목표가 설정돼 있기에 다른 것은 논의대상조차 아니다. 하지만 보라. 전체 학생의 몇 퍼센트가 이른바 명문대학에 입학하는가? 극소수의 성공적인 대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영혼이 스러지고 메말라가고 있는가. ‘탈학교’ 행렬이 여전히 늘어가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입증하는가?

교복폐지는 거리를 누비는 숱한 이 나라 제복들 가운데 청소년을 제외하자는 것이다. 두발 자유화는 폐지되는 교복과 더불어 학생인권과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학생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면, 스스로 성숙하고 사려깊은 판단과 행동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스마트폰’으로 중무장한 세대다. 그들은 지식과 정보의 총량에서 기성세대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다. 그런 청춘을 19세기의 익숙한 울타리로 몰아넣고 전근대의 표상 ‘프로크루스테스’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모두가 교육 전문가인 기성세대는 말한다. “청소년 탈선문제는 어쩔 것이며,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들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윤리적 판단과 실천을 도무지 믿지 않는다. 논리의 밑바닥에는 ‘어리고 미숙하며 철딱서니 없는 청소년’이란 금과옥조가 자리한다. 학부모와 교사가 지도하고 선도하지 않으면 어린것들은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야 말 것이라는 확고부동한 믿음이 신앙처럼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자유’라는 단어는 ‘나로 말미암다’는 뜻이다. 하나의 선택과 그것이 야기하는 모든 과정과 결과까지 내가 책임지겠다는 의미가 온축돼 있다. 청소년들이 어릴 적부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훈련시키지 않은 자신들을 반성하지 않고, 그것을 억압적인 교복과 두발에 의지하는 자세는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청소년 문제는 가정교육의 부재에서 발원한다. “공부만 잘 하면 돼!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야!” 유치원부터 고3까지 15년 넘는 세월을 그렇게 가르친 학부모의 무한욕망이 만들어낸 것이 이른바 청소년 문제다. 어떤 숭고하고 아름다운 목적도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숙고했으면 좋겠다. 편안한 교복, 아니 교복폐지와 두발 자유화가 가져올 자유로운 개인과 성숙한 민주사회를 그려본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