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메리 셸리(1797∼1851)가 ‘프랑켄슈타인’을 출간한 1818년 러시아에는 잊히지 않을 인물이 태어난다. 산문시와 소설, 희곡 모두에서 천품을 발휘한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가 주인공이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황금시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심훈의 ‘상록수’를 읽다 보면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투르게네프의 ‘처녀지’ 때문이다.

일본의 근대를 이식받은 식민지 조선 문인들이 열광했던 작가 가운데 하나가 투르게네프라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다. 일본 지식인과 문인들 역시 투르게네프의 문학적 성과에 매료되었다고 전한다. 그런 배경에는 ‘뜬구름’의 작가이자 러시아문학 번역가였던 후타바테이 시메이(1864∼1909) 같은 인물의 열성적인 노력이 자리한다. 뛰어난 원작과 성실한 번역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문학의 융성과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이다.

젊은 날 윤동주의 ‘툴계녭의 언덕’을 읽고 망연해진 적 있었다. 제목에 들어있는 어휘 ‘툴계녭’이 너무 친숙했던 때문이다. ‘저건 분명 투르게네프지!’ 그런 확신에 전신이 짜릿해지는 것이었다. 헌책방에서 구한 시집에 있던 ‘툴계녭의 언덕’.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투르게네프의 언덕’으로 읽는다. 당대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는 듯하여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러시아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투르게네프의 산문시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만년의 투르게네프가 인생의 깨달음과 소회를 질박하고 깊이 있게 드러낸 걸작이기 때문이다. ‘거지’(1878)는 그 가운데 하나다. 길 가던 시인이 거지를 만난다. 새빨간 가난에 무너져버린 거지가 그에게 적선의 손을 내민다.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조리 뒤져 보지만 시인에게는 돈과 시계는커녕 손수건도 없다. 거지의 손을 황망하게 잡아주는 시인. 거지는 몹시 미안해하는 시인에게 ‘그것도 적선’이라며 고마움을 전한다.

동주의 ‘툴계녭의 언덕’은 전혀 다르다. 연희전문 2학년 시절에 쓴 시에서 시인은 인도적이며 낭만적인 투르게네프와 사뭇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갯길을 넘다가 거지 소년 셋과 마주치는 시인. 무서운 가난에 삼켜진 아이들의 묘사가 우리를 전율케 한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이었다.” 시인도 이 장면에서 러시아 시인처럼 주머니를 뒤진다.

식민지 조선 시인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다. 두툼한 지갑도, 시계도, 손수건도.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만지작거릴 뿐 내주지 않는다. 그에게는 ‘용기’가 없다. 이야기나 해볼 요량으로 “얘들아!” 하고 부르지만 아이들은 흘끔 돌아볼 뿐 제 갈 길을 간다. 아무도 없는 언덕에는 짙은 황혼만이 밀려올 뿐이다. 왜 동주는 적선하지 않았을까?! 돈이나 시계는 몰라도 손수건은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투르게네프처럼 아이들 손이라도 잡아줄 수 있지는 않았을까?!

용정의 부모가 보내주는 월사금으로 공부하는 유학생이라 해도 그의 시에 내재한 영혼과 정신은 분명 적선을 요구했을 터. 일회적인 적선이 소년들을 가난에서 해방하지는 못한다 해도 인간적인 동정과 연대감 표시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프랑켄슈타인’에서 셸리는 창조주의 위치로 올라서려는 인간의 욕망과 비겁함과 무대책을 그려낸다. 투르게네프는 ‘거지’에서 공감과 연대를 보여준다. 반면에 동주는 대학생의 화사하고 소심한 자아에 멈춰있다. 연민과 동정과 연대가 사라진 문학에는 예술혼과 미래가 없다.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어야 한다. 장자의 ‘학철지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갈급한 지경의 사람들과 공감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것이 도리이기 때문이다. 잠시 옛시인들을 돌이키는 가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