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1921년 11월 ‘개벽’ 월간지에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가 실린다. 소설의 주인공인 젊은 부부는 결혼한 지 7∼8년이 되건만, 실제로 같이 지낸 세월은 1년 남짓. 아내는 동경 유학생 남편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으나, 돌아온 그는 날마다 술타령이다. 어느 날 새벽 두 시, 고주망태가 된 남편에게 아내가 묻는다. “누가 이렇게 술을 권했는가요?” 남편 가로대 “이 사회란 것이 술을 권했다오!”

아내는 ‘사회’라는 어휘를 알지 못한다. 아내와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은 무너지는 억장을 두드리며 다시 나가버리고 아내는 서글픈 마음에 혼잣말한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근대화를 이룬 일제(日帝)를 배우러 유학 떠난 남편과 구시대 습속과 문화에 익숙한 아내의 소통불능에 기초한 ‘술 권하는 사회’.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의 명예욕과 자리다툼으로 인한 분열에 괴로운 남편의 유일한 출구가 음주인 것을 아내는 끝내 헤아리지 못한다.

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대상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에 있다. 중학을 마친 남편이 공부하러 동경에 있던 세월 아내는 ‘공부’를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한다. 그녀의 물질적인 욕망을 일거에 해소해주는 신묘한 화수분 같은 공부. 그러하되 남편은 신문물과 사상, 변화된 세상을 공부에서 찾으려 한다.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조선의 변화와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백일몽(白日夢)이 되어버린다.

‘술 권하는 사회’ 이야기를 꺼낸 것은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저출산 문제 때문이다. 세계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이질친 한국의 출산율을 걱정하는 목소리들 탓이다. 2025년이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는데, 이렇게 출산율이 낮으면 한국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장탄식 늘어놓는 언론보도가 하루가 멀다 않고 얼굴 내민다. 언론은 지금과 미래의 노인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라도 가임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신생아가 미래 한국의 동량(棟梁)이 되고자 태어난다고 생각하시는가? 노인을 부양하는 산업 역군으로 아이들이 등장해야 한다고 믿으시는지? 아이에게는 나름의 인생과 미래와 꿈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지금과 여기의 우리를 책임져야 하는 산업 예비군이 아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노인세대 봉양을 위해서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삶에는 나름의 인과율과 연기(緣起)가 작동한다.

지금 세상은 참 빨리 변하고 있다.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이 상용(常用)화된 것은 불과 10년 전 일이다. 그 후 스마트폰은 어떻게 진화했는가? 페이스북과 트위터, 카카오톡과 텔레그램이 우리 삶 속으로 침윤한 것 또한 불과 10년 남짓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불러온 변화의 폭과 깊이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여성들에게 국가를 위해, 나이든 세대를 위해 출산을 강요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것은 낡아빠진 전근대의 표본이다.

그 동안 저출산 극복을 위해 정부가 투여한 예산은 또 어떤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20조원, 2011년부터 2015년까지 61조원, 2016년부터 2020년까지 108조원이 책정돼 있다. 무려 100조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되었는데, 상황은 어떤가? 차라리 신혼부부나 동거하는 남녀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저출산 문제는 애국심과 막대한 예산으로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들과 달리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

청년세대의 고질적인 일자리 부족과 해결난망인 주거문제, 평생 지속되는 경쟁만능과 승자독식, 노인들의 우울한 일상, 행복과 담쌓은 나라. 이런 문제가 선결(先決)되지 않으면 저출산 대책과 거액의 예산투입은 ‘깨진 독에 물 붓기’일 따름이다.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우리의 소박하지만 명확한 꿈이 성취되면, 단언컨대 아이들 웃음소리 가득한 한반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