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새마을운동가 구술 채록
④ 김선애 전 경상북도새마을부녀회장(上)

▲ 김선애 전 경상북도새마을부녀회장이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김선애(56) 전 경상북도새마을부녀회장은 1962년 11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의성에서 새마을부녀회장을 하던 모친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봉사와 새마을운동을 접했다. 1985년 결혼을 한 후 대구에서 살면서도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남편 직장때문에 구미로 이전한 뒤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장을 시작으로 새마을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2006년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을 6년간 역임하고 2012년부터 올해 2월까지 경상북도새마을부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12년동안 구미시와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을 역임하면서 알뜰장터와 새마을대청소 등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올해 2월 경북도새마을부녀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지역 봉사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구미 새마을여성합창단장 시절
보조금 없어 발품팔아 단원 구색 갖춰
단원들 자비로 전국대회 출전도
베트남서 첫 해외공연… 열악한 조건에도
땀 흘리며 마치자 끊임없는 박수세례

△봉사는 대가를 바라고 하는게 아니다

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어요. 어릴적 기억에 어머니가 새마을부녀회장을 오래 하셨어요. 지금은 임기가 있어 임기가 끝나면 다른 사람이 하지만, 당시에는 부녀회장을 하면 임기라는게 없었던 것 같아요.

시골이었으니까 더 그랬겠죠. 그리고 우리집이 구판장을 했으니까 당연히 어머니가 부녀회장을 하신거 같아요. 시골동네여서 그런지 어머니가 부녀회장이고 다른 아주머니들은 모두 부녀회원이었어요. 동네 전체 아주머니 모두가 부녀회원이었죠. 내 기억으로는 동네에서 무슨 일만 있으면 어머니를 비롯해 동네 아주머니 모두 모여 일을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땐 단합이 참 잘되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도 매우 적극적인 성격이셨기에 동네 잔치, 동네 청소 등 모든 일에 적극적이셨어요. 내가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 하기 전까지 어머니가 하시는 일들을 옆에서 보면서 자랐죠. 제가 조금 철이 들고나서는 어머니가 하는 일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리 열심히 일을 하는지 몰랐거든요.

나중에 알았죠. 그게 봉사였고,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을. 사춘기 시절 어머니께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냐고 물어 본 적이 있었요. 그때 어머니는 웃으면서 “봉사는 댓가를 바라고 하는게 아니다”라고 대답하셨는데 그 말이 잊혀지지 않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바로 새마을정신이 아니었나 싶어요.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장을 맡다

결혼하고 대구에서 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직장문제로 구미로 오게 됐어요. 대구에서도 봉사활동을 했었으니까 구미에 와서도 봉사활동을 계속했죠.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다보니 여러사람들을 알게됐어요. 그러다 어느날 한 지인분이 새마을여성합창단장직에 나를 추천하셨어요. 난 합창단원을 한 적도 없고, 합창단에 대해 솔직히 아는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거절을 했죠. 거절은 했는데 너무 신경이 쓰이는 거에요.

그래서 여성합창단에 대해 조금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이게 원래는 송정어머니회 합창단이었다가 나중에 없어지면서 새마을합창단에 편입이 되었더라구요.

근데 보조금이나 이런게 없다보니 사실상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그러니 활동하기가 많이 어려웠던거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어요.

합창단에 대해선 모르지만 대외적인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또 부단장이 있으니까 내부적인 일은 부단장이 하고 외부적인 일은 단장이 하면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장을 하기로 결정했죠.

근데 막상 합창단을 보니까 힘든 점이 한 둘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내가 합창단에 대해 잘 모르고, 외부인이다보니 보이지 않는 텃새 같은 것도 조금 있었구요. 그런건 사실 별 문제는 아니었고 진짜 문제는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어요.

합창단원들이 무대에 서려면 그래도 무대복이라도 변변한게 하나 쯤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그래서 발품을 팔았죠. 돈이 없으니 발품이라도 팔아야 했어요. 다행히 대구에서 생활할때 아시는 분이 섬유공장을 하고 계셔서 무대복을 만들 수 있는 천을 협찬을 받고, 무대복을 만드는 것도 전부 협찬을 받았어요. 구두도 협찬을 받고.

그분들에게 그냥은 못가니까 연락해서 점심이나 하자고 약속을 잡고 밥 먹으면서 부탁을 했죠. 그렇게 발품을 팔아 단원들의 복장을 다 갖출 수가 있었죠.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그분들이 도와주신거죠. 지금도 그때 도와준 분들에게 감사하죠. 참 고마운 분들이었어요.

▲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이 서산시에서 열린 장애인을 위한 사랑의 음악회에서 특별 공연을 펼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이 서산시에서 열린 장애인을 위한 사랑의 음악회에서 특별 공연을 펼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전국합창대회에서 장려상을 받다

합창단이 어느정도 구색이 갖추어진 뒤로 여러 무대에 오를 수 있었어요. 매년 두 차례 정기연주회와 각종 행사에 특별출연을 했죠. 그래도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이니만큼 구미를 알릴 수 있는 합창단이 되고 싶었어요.

좀 더 전문적인 합창단이 되어야했죠. 하지만 재정적으로 열악하다보니 전문가를 모시기가 사실 어려웠어요. 지역 대학에는 음대가 없다보니 다른 지역에 계신 분들이 오셔야 하는데 교통비 드리기도 빠듯한 실정이었으니 사실상 어려웠어요.

사실 반주자와 지휘자는 전문가가 해야하는 거에요. 시에서 보조금을 주긴 했는데 사실상 그분들에겐 너무 적은 금액이었죠. 사실상 봉사개념으로 봐야 했어요.

그래도 그런 분들이 계셔서 전국대회에 나갈 수 있었어요. 보조금은 전부 그분들에게 줄 수 밖에 없으니 단원들은 모두 자비로 했어요. 연습하고 난 뒤 밥이나 간식 같은 건 모두 단원들이 자비로 했죠. 그만큼 합창단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어요. 그런 열정으로 전국대회에 나가게 됐어요.

내가 단장을 맡고 처음 나가는 전국대회가 바로 제주도에서 열리는 탐라전국합창경연대회였어요. 2004년도에 열린 대회에 우리가 참가했어요. 그때 장려상을 수상했어요. 비록 1등은 아니었지만 열악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었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어요. 그래서인지 당시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주었어요.

신문에 우리가 장려상을 탄게 보도가 많이 되었죠. 새마을여성합창단이 새마을운동의 발원지인 구미를 전국에 알렸다며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가슴 한켠이 뜨거워 지는게 참 고맙고 대견하게 생각해요. 그 일을 계기로 많은 행사에서 우리를 찾아주셨어요.

환경연수원의 숲속음악회, 금오공대 총동창회 축하공연, 길거리 공연 등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에는 꼭 우리 새마을여성합창단이 함께 했죠. 참 행복했어요.

▲ 김선애 경북도새마을부녀회장이 받은 대통령 표창장과 포장증.
▲ 김선애 경북도새마을부녀회장이 받은 대통령 표창장과 포장증.

△해외 공연으로 새마을운동을 알리다

전국 대회에서 입상을 한 뒤 해외 공연까지 가게 됐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해외 공연이 처음으로 간 베트남 공연이었어요. 첫 해외 공연이라 사실 기대했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너무 시설이 열악한 거에요. 정말 너무 놀랐어요.

공연장이라고 마련된 곳이 그냥 천막이 쳐진 곳이었고, 그 더운날에 냉방은 전혀 안되어 있었어요. 대형 선풍기가 있었는데 그건 또 관람하는 사람들 쪽으로 되어 있었죠. 그래도 공연을 하러 간 이상 공연을 무사히 마쳤죠. 정말 열심히 했어요. 무대에 조명 장치가 없어 단원들이 노래를 하면서 손전등을 돌려가며 노래를 불렀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땐 진지했어요. 정말 좋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진심으로 공연을 열심히 하니까 통하더라구요. 그사람들도 우리가 무대복을 입고 땀을 줄줄 흘려가며 공연을 하니까 감동을 받았었나봐요.

박수가 끊임없이 나왔어요. 베트남에서 그렇게 열정적인 박수를 받은 사람들은 아마 우리 합창단원밖에 없을 거에요. 무엇을 하더라도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게 새마을운동이잖아요. 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단원들은 공연으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새마을운동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 것이라고.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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