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새마을운동가 구술 채록
③ 이헌영 전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 (上)

▲ 이헌영 전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이 구미공단 조성 당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이헌영(88) 전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은 1930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6.25전쟁 중인 1952년 배고픔이 싫어 자원해서 군에 입대했다.

8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1971년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될 당시 구미로 왔다. 공단 내 직물협업단지의 공장을 관리하는 직물협업회 상무이사로 근무하면서 새마을운동을 처음 접하게 된다. 자진해 새마을운동 지도자 교육을 받은 이 전 회장은 당시 직물공장에서 근무하는 나이어린 근로자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새마을운동 교육을 시작했다.

직물협업단지에서 시작한 그의 새마을교육은 이후 공단전체로 확대됐다. 이후 공단동 새마을협의회장을 거쳐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과 경상북도새마을협의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 전 회장은 90이 다 되어가는 나이임에도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1973년 28개 구미 직물공장 관리
당시 경쟁 심했던 각 공장들 설득해
‘새마을체육대회’ 개최
직장윤리·애사심·협동심 크게 고취

△ 전쟁통에 배고픔이 싫어 군에 자원입대

난 안동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랐어요. 당시 어릴때는 남들이랑 다 똑같아요. 시골이다 보니 모두가 힘든 시기였어요. 어릴적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어요. 배고팠던 기억밖에 없으니까요. 그 배고픔이 싫어 군대에 입대했어요. 6.25가 한창이던 1952년에 입대했어요.

군에 가면 밥을 많이 준다는 말만 믿고. 그 당시에 굶어 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별반 다를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배가 고팠어요. 군에 가니까 정말 밥은 많이 주더군요. 전쟁 중이라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지만, 악착같이 살아 남았어요.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군에 있었어요.

지금 사람들은 이런 말하면 웃을지 모르지만, 난 당시 끼니 걱정하기 싫어서 군에 남았어요. 8년 간 군생활을 했죠. 제대 후에는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구미에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구미로 가게 됐어요.

 

▲ 이헌영 전 회장이 사비로 새마을연수원 지도자반에 입교해 받은 수료증.
▲ 이헌영 전 회장이 사비로 새마을연수원 지도자반에 입교해 받은 수료증.

△국가산업단지 조성을 위해 구미에 첫 발을 딛다

군 제대 후 대구에서 일반 직장에 다니다가 1972년 6월 구미로 가게 됐어요. 당시 구미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있었는데 산업단지 내 직물협업단지를 조성하는게 나의 일이었어요. 당시 산공부에서 직물업체를 관리하도록 구미직물협업회를 조직했는데 내가 상무이사로 있었죠.

공단에 중소기업들을 유치해 수출품을 만들려고 했기에 체계가 잡히지 않은 중소기업들을 관리하는 조직이 필요했던거고, 그게 바로 직물협업회였어요. 그 일을 맡아하기로 하고 처음 구미에 왔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와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냥 황무지였어요.

주민들이 살고 있는 자연부락만 군데군데 있을 뿐이었어요. 자연부락의 주민들도 공업단지 조성으로 이주하기에 바빴어요.

그때 9만5천평의 공장부지를 조성하는게 나의 주 업무였는데, 건물 철거에서부터 묘지 이장, 정지작업 등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너무 힘들었어요.

당시에는 변변한 이동수단이 없어 조성되는 공단을 걸어다녀야 했고, 밥을 먹고 잠을 잘 곳도 마땅치 않아 여간 힘든게 아니었어요. 그래도 참고 일을 하니까 결국 공장이 하나 둘 들어서고, 산업단지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하더라구요.

1973년 하반기부터는 일부 공장이 가동을 시작해 수출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어요.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뜨거워지는게 감격스럽고 뿌듯했어요. 그때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어요.

△새마을운동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하다

국가산업단지가 조성이 되고 직물협업단지에는 28개의 직물공장이 입주했어요. 지금은 자동화나 기계화가 되어 있으니 일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당시에는 직기 하나에 사람 1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구하기 위해 구미로 왔어요.

직물협업단지에 28개의 공장이 있고, 그 공장에 직기가 6천여대가 넘게 있었으니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죠. 전국에서 한꺼번에 4천여명이 공단에 들어왔어요. 이 중 80%이상이 미혼여성이었죠. 아무래도 천을 짜는 일이라 어린 여성들이 많았어요.

배고픈 시절이라 처음에는 끼니만 해결되면 월급을 주지 않아도 된다며 공장을 찾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래도 어떻게 월급을 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 국가에서 관리하는 국가산업단지인데. 직물공장이 대부분 영세업체이긴 해도 수출품을 제조하는 공장이어서 많지는 않지만 월급은 줄 수 있는 기업들이었어요. 그렇게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수월하게 진행이 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곧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죠. 새롭게 만들어진 공장이고 직원 대부분이 경력이 없는 젊은 여성들이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경력이 쌓인 여성직공들의 이직이 많아진거에요.

그 이직이라는 것이 바로 옆에 있는 공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구요. 그러니 업체간에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기껏 기술을 가르쳐 놓으니까 옆 공장에서 월급 조금 더 올려주고 빼내가니 사이가 좋아질리 없잖아요.

공장이 28개뿐이니 처음에는 사장들도 서로 잘 지냈는데, 기술자를 빼가는게 문제가 되어 사장들의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졌고, 공장마다 다른 공장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사태까지 일어났어요. 그러니 자연히 생산능률도 떨어졌구요.

공단을 관리하는 나로서는 가만히 보고 있을수만은 없없어요. 그러던 중 공장새마을운동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공장 사장들을 찾아가 새마을운동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어느누구도 하지 않으려 했어요.

그래서 내가 새마을운동 지도자가 되기로 한 거에요. 1975년 4월 사비로 상공부 제2 새마을연수원 지도반에 입교해 교육을 받았어요. 그게 저와 새마을운동의 첫 만남이었죠.

 

▲ 1976년 직물협업단지 내 업체 직원들의 단합을 위해 마련된 체육대회 모습.
▲ 1976년 직물협업단지 내 업체 직원들의 단합을 위해 마련된 체육대회 모습.

△단합만이 살길이다

막상 새마을지도자 교육을 받고 돌아왔는데 어느 업체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새마을운동은 행동이고 실천이다라는 교육까지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우선 공장새마을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경영자와 관리자가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했어요. 그래서 24개 업체의 사장들로 구성된 새마을 산업시찰단을 조직해 우수새마을업체였던 한일합섬 등 12개 업체를 차례로 시찰하고 추진사례를 듣도록 했어요. 큰 기업의 업무추진사례 등은 중소기업에게 큰 도움이 되다보니 새마을 산업시찰단은 잘 운영이 되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경력직들의 이직으로 인해 사장들의 관계는 좋지 않았어요. 사장들의 관계가 좋지 않으니 당연히 직원들도 다른 공장직원들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죠.

난 이런 문제가 직장윤리와 애사심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단에 있는 전 사원들이 참여하는 단합행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추진했어요. 예상은 했지만 반대가 무척 심했어요. 겉으로의 반대 명분은 회사가 하루 쉬면 손해가 막대하다는 거였어요. 또 체육대회를 하고 나면 그 다음날 힘들어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반대하는 이유였어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거였죠. 다른 공장직원들과 한 자리에 두게 되면 이직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계속 찾아가 설득하는 방법 이외에는. 계속 찾아가니까 나중에는 만나주지도 않는 사장까지 생겼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끈질긴 설득에 지친 13개 업체가 참여하는 새마을체육대회가 결국 열리게 되었어요. 2천여명이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기회사 선수들을 응원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었어요. 참가한 직원들도 사장도 모두가 만족하는 대회가 됐어요. 체육대회 이후 직원들이 애사심을 가지게 되면서, 무단으로 전출하는 일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당연히 생산성도 크게 향상되었구요. 체육대회는 그 후 1976년 17개 업체가 참여했고, 1978년에는 21개 업체에서 3천여명이 참가하면서 아주 큰 행사가 되었어요. 다른 공단에서도 부러워하는 연례행사가 된 거죠.

자연히 사장들도 사이가 좋아졌구요. 서로 경쟁만하는 사이가 아니라 협동해 같이 살아가야하는 진짜 동지가 된거죠.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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