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역마살(驛馬煞)’이란 말이 있다. 사전에서는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언제나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 액운”이라 풀이한다. 필시 나한테 적용되는 것이리라. 60평생 살면서 서른 번 넘게 이사했으니 말이다. 이사도 이사려니와 이곳저곳 다니기를 좋아하는 성정(性情)이고 보니 부초(浮草)처럼 떠돈 곳도 적지 않다. 그래선지 나는 역마살을 액운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고전시대 혹은 농경시대 정착민의 사고일 것이다.

그럼에도 같은 곳에서 오래 살아가는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다. 이른바 ‘토박이’라 불리는 사람에게서 묻어나는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좋아 보이는 것이다. 오랜 세월 한 곳에서 산다는 것은 인근 주민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살아감을 뜻한다. 동네 이력이나 생활상의 변천을 낱낱이 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근자에 나의 정착기간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주민 생활을 접고 정착민이 되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 대구 신천대로를 달리다가 남루한 이사차량을 보았다. 오전 10시 무렵 이미 34∼35도를 오르내리는 도로를 2.5t짜리 포터트럭이 허름한 장롱과 약간의 세간을 싣고 달리고 있었다. 고무밧줄로 엉성하게 묶은 단출한 이삿짐을 싣고 한여름 거리를 질주하는 트럭에서 내 지난날을 본 것이다.

행운유수처럼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청춘을 탕진했던 저 빛나던 20∼30대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장렬한 7·8월 땡볕도, 한겨울 설한풍(雪寒風)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위대한 청춘은 마침내 스러졌다. 그 시절 다반사로 이사했건만,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아, 다시 새로운 곳으로 가는구나. 거기서 무엇인가 빛나고 아름다운 새로운 인생과 대면할 수 있을 거야. 그런 희망이 하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런 동화같은 삶은 끝내 오지 않았다.

20대 중반, 부모님은 서울시민을 포기하고 산본 신도시로 이주했다. 이사가는 초여름 날 가랑비가 온종일 대지를 적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비가 왔다는 사실보다 어머니의 긴 한숨을 지금도 기억한다. 장롱 깊은 곳에서 어머니는 아버지 함자를 한자로 새긴 문패를 꺼내면서 말했다. “결국 이 문패는 걸지 못하겠구나!” 만석꾼 막내며느리로 시집와 장구한 세월 주구장창 이사만 다녀야 했던 어머니의 장탄식(長歎息)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상경을 단행했지만, 끝끝내 그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한 채 외지의 16평 아파트로 이사해야 했던 1980년대 중반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것이 연기(緣起)의 법칙인지 모르지만, 유학과 귀국 이후에도 나는 도회에서 도회를 떠돌았다. 그 어디에도 나의 고단한 육신과 영혼을 안온하게 누일 공간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신천대로를 질주하던 이사 트럭에서 연민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푹푹 찌는 이런 무더위에 이사라니?!

이러매 초원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목축민들의 이사는 얼마나 단출하고 홀가분한 것인가. 게르나 유르트를 거주 공간으로 삼은 사람들의 허허로움은 도회의 정착생활에 묶인 세계시민들에게는 한여름 유성(流星)처럼 부러운 것이다. 짧은 동안에 철거와 건축이 용이한 구조물을 마차로 가지고 다니면서 이동하는 헐거운 삶의 자유로움은 그야말로 너끈한 것 아닌가. 미미한 세간 실은 이사트럭을 설익은 감상(感傷)으로 바라본 내가 외려 쑥스럽다.

100만이 넘는 우리 이웃들이 아직도 지하방과 옥탑방, 그리고 판잣집에서 폭염과 맹추위를 견디며 살아간다. 올해같은 가마솥더위에 고령의 노인이 세상 버리는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다.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하는 부의 공평한 분배와 보편적 복지의 실현이 조속한 시일 안에 이루어지면 좋겠다. 한여름 땡볕의 우울한 역마살 이사가 아니라, 화사한 미래기획과 결부한 호쾌한 이사라면 얼마나 흐뭇한 일이겠는가.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