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여인들 ⑥

▲ ‘꽃들이 질투할 만큼 아름다웠다’고 기록된 미실은 다수의 신라 왕과 귀족들에게 사랑받았다. 그건 그녀에게 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삽화 이찬욱
▲ ‘꽃들이 질투할 만큼 아름다웠다’고 기록된 미실은 다수의 신라 왕과 귀족들에게 사랑받았다. 그건 그녀에게 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삽화 이찬욱

먼저 얼핏 보기엔 ‘난잡한 여성의 남성 편력기’로 오해될 수도 있는 기록부터 옮긴다.

“14살에 황후의 아들과 혼인한 그녀는 첫 남편의 곁을 떠나 신라의 전쟁영웅 중 하나였던 화랑 사다함(斯多含)과 뜨거운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가 한 사내 옆에 머무는 것을 신라의 지배자와 귀족들은 견디지 못했다. 진흥왕과 진평왕을 비롯해 금륜태자와 화랑 설원랑까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남성들이 귀애한 그녀는 5명의 왕·왕족·귀족 사이에서 8명의 자녀를 낳았다.”

궁금증이 생긴 이들이 ‘대체 그 여성이 누구냐’는 질문을 해올 게 빤하다. 미실(美室·549~606 추정). 외형적 아름다움과 내면에 잠재한 정치력으로 6세기 말 신라를 자신의 치마폭에 가둔 여걸.

한국여성문학연구회장을 지낸 정영자(77)는 미스터리와 비밀 속에 존재해온 미실을 이렇게 정의한다.

“3명의 왕과 왕자들, 화랑 사다함을 비롯한 숱한 호걸영웅을 미색으로 녹였고 왕실의 권력을 품었던 여성, 욕망에 솔직하면서도 자유를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당당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고.

◆ 세상의 모든 여성이면서 그 모두를 뛰어넘은 ‘어떤 존재’

정영자가 평론가다운 정제된 문장으로 미실을 표현했다면, 소설을 통해 그녀를 21세기 한국사회로 불러낸 장본인 김별아(49)의 서술은 좀 더 드라마틱하다. 읽어 보자.

“이러저러한 매체를 통해 이제는 세간에 그 이름이 제법 알려진 미실은 짧지 않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여인이다. 성녀와 악녀, 어머니와 창부의 바탕을 한 몸에 가진 그녀이기에 누군가는 그녀에게 매혹되어 열광하고 누군가는 질시하며 비난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미실은 세상의 모든 여성이면서 그 모두를 뛰어넘은 어떤 존재다.”

혹자에겐 ‘미색을 무기로 권력의 정점에 섰던 여인’으로,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겐 ‘고대(古代)를 살았던 희귀한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미실.

그녀와 관련된 가장 많은 기록이 담긴 건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記)’다.

그 책에 따르면 미실은 왕가의 사내들은 물론, 귀족과 화랑들을 자신의 품에 넣고 좌지우지하며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다. 미실의 출생에 관해 ‘화랑세기’는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신라 왕족과 귀족에게 색공(色供·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제공하는 성적 서비스)을 바쳐 자신의 권세를 유지했다. 출중한 아름다움과 함께 학식도 가졌던 여인으로 외할머니는 초대 풍월주(風月主) 위화랑의 딸 옥진이었다. 미실의 아버지는 2대 풍월주인 미진부다.”

역사학자 신재홍의 논문 ‘미실과 사다함, 송사다함가와 청조가’에는 미실의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미실은 용모가 절묘했다. 풍만하고 도톰함은 외조모를 닮았고, 마음까지 밝고 총명하면서도 오묘했으니 온갖 꽃들이 그녀를 질투할 정도였다.”

하지만, 미실과 ‘화랑세기’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태어난 날과 사망일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미실. 필사본 ‘화랑세기’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미실은 실존했던 여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 왕의 즉위와 폐위에까지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미실. 그녀는 보기 드문 ‘고대의 여성 권력자’였다.  /삽화 이찬욱
▲ 왕의 즉위와 폐위에까지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미실. 그녀는 보기 드문 ‘고대의 여성 권력자’였다. /삽화 이찬욱

◆ 과연 미실은 권력만을 탐했을까?

아득한 옛날의 사건이나 인물을 놓고 벌어지는 학계의 ‘진위논쟁(眞僞論爭)’은 별스런 것이 아니다. ‘화랑세기’와 ‘미실’에 얽힌 사학자들 간의 설왕설래 역시 그런 차원에서 보면 될 터.

필사본 ‘화랑세기’를 부정적 관점이 아닌 긍정적 시각에서 해석한 하현진의 논문 ‘화랑세기에 나타난 신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활동’엔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까지 미실이 가졌던 정치권력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서술이 눈에 띈다.

“미실은 색공을 통해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대(代)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신라 왕실에 큰 힘을 발휘했다. 미실이 정치 일선에 있으면서 왕의 즉위와 폐위에 관여했을 정도니 얼마나 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미실의 삶을 통해 신라 사회에서는 여성도 권력을 지닐 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쯤에서 자연스레 질문 하나가 이어진다. 그렇다면 미실은 오로지 정치적 권력만을 탐한 여자였을까?

아래 인용하는 향가(鄕歌·향찰로 표기된 신라시대의 노래)인 ‘송사다함가’(학자에 따라 ‘풍랑가’ 혹은 ‘송랑가’ 등으로도 부른다)’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읽힌다.

바람이 분다고 해도

랑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해도

랑 앞에 치지 말고

어서 빨리 돌아와

다시 만나 안아 보기를

마주 잡은 손만으로도 좋은데

우리 행여 헤어지진 않겠지

‘화랑세기’에 의하면 미실이 썼다고 전해지는 이 향가는 신라가 대가야와 전투를 벌일 때 참전한 연인 사다함에게 노심초사의 애틋함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송사다함가’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쟁터로 사랑하는 이를 보내야 하는 여인의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TV 드라마를 포함한 대중문화 매체에선 미실을 성적 기교와 미모를 무기 삼아 수많은 남성들 위에 군림한 ‘냉혹한 여성 권력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그게 미실의 본모습일까?

그런 사람이 과연 위와 같이 ‘따스한 문장’을 쓸 수 있었을까?

어쩌면 미실은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여러 사내들의 마구잡이식 사랑이 아닌, 한 남성의 완전하고 오롯한 사랑을 받고 싶었던 ‘순정한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우두머리 화랑들의 삶을 기록했다고 알려졌다. 경주시 석장동에 세워진 화랑을 형상화한 조형물.
▲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우두머리 화랑들의 삶을 기록했다고 알려졌다. 경주시 석장동에 세워진 화랑을 형상화한 조형물.

미실을 역사 속에서 불러낸 책 ‘화랑세기’

“인간의 상상 밖에 존재하는 바다 풍경을 묘사했다”고 평가받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백경(白鯨)’. 그 작품의 주인공은 ‘크기를 짐작할 수 없을 만치 거대한 고래’다.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의 과정에서 ‘뿌리 뽑힌 사람들’로 전락한 이들의 서러운 풍경을 빼어난 문장으로 형상화한 황석영의 수작(秀作) ‘삼포 가는 길’의 주인공은 타락과 순수의 경계선을 위태롭게 걸어가는 작부 백화.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화랑의 리더 풍월주들의 전기’로 기술했다고 전해지는 책 ‘화랑세기’의 주인공은 ‘미실’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화랑세기’는 7세기가 끝나갈 무렵 ‘신라의 문장가’로 이름 높던 김대문이 썼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원본은 소실돼 전하지 않는다. 다만 필사본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1989년과 1995년 공개돼 논란이 일었다.

필사본을 베낀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일제강점기 일본 왕실 도서관에서 일한 박창화(1889~1962).

다수의 사학자들은 필사본 ‘화랑세기’를 두고 “상상력으로 만든 창작품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다른 쪽에선 “여러 정황과 사실 묘사의 핍진성으로 볼 때 위서(僞書)로 보이지 않는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어쨌건 ‘진위 논란’과는 별개로 ‘화랑세기’의 진정한 주인공이 ‘문제적 신라 여성’ 미실이라는 것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에 관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를 쓴 김태식은 이렇게 부연한다.

“‘화랑세기’를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치고 들어가게 만든 신호탄은 소설가 김별아의 ‘미실’이다. 소설이 주인공으로 삼은 미실은 ‘화랑세기’가 아니면 영영 매몰되었을 인물이었다. 김별아는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 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여성을 문학으로 극화해냈다.”

조선시대 때부터 “이미 사라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풍문처럼 전하는 책”으로 평가절하 된 ‘화랑세기’.

하지만, 일부 사학자들은 “화랑과 당대 신라 귀족들의 성 풍속을 거침없이 드러냈기에 유학이 지배했던 사회가 ‘화랑세기’를 배타적으로 대했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건 필사본 ‘화랑세기’가 지닌 가치와 의미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1천400년 전 아득한 기억 속 서라벌을 들었다 놓았다 했던 매력적인 여성 미실에 대한 ‘대중적 주목’은 ‘화랑세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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