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우 제9대 포스코 회장 인물탐구

제 9대 포스코 회장으로 선임된 최정우 회장은 1983년 포스코에 입사한 뒤, 재무실장, 정도경영실장, 가치경영센터장, 포스코건설 경영전략실장, 포스코대우 기획재무본부장 등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회계, 원가관리부터 심사분석 및 감사, 기획 업무까지 제철소가 돌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핵심 업무를 두루 경험하며 현장 구석구석에 대해 누구보다 밝은 눈을 가지게 됐다.

공정 간 물류는 어떻게 관리되고, 공정 간 가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실수율은 어떠한지 등의 현장 프로세스를 손바닥 보듯 해야 원가든 심사든 감사든 주어진 업무를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업무 경험이 36년간 고스란히 쌓여 ‘철강업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경남 고성 구만초등학교·회화중학교 전교 1등 우등생
1983년 포스코 입사, 동기회장 맡으며 ‘회장 되겠다’ 결심
포스코켐텍서부터 준비한 ‘경영 아이디어 노트’ 로
100년 기업 포스코에 ‘준비된 적임자’ 이미지 얻어

여기에 포스코건설, 포스코대우를 거쳐 포스코켐텍에 이르는 그룹사 근무 경험은 철강 이외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됐다.

이러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경력이 그를 ‘철강 그 이상의(Steel & Beyond)’ 100년 기업으로 도약을 준비하는 포스코에 딱 맞는 적임자로 만들어 주었다.

2015년부터는 포스코그룹의 컨트롤타워 격인 가치경영센터를 이끌며 그룹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그룹 사업재편과, 재무구조 강건화 등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반을 다지고, 리튬, 양극재, 음극재 등 신사업을 진두 지휘함으로써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포스코의 100년 미래성장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비핵심 철강사업은 매각했으며, 유사한 사업부문은 합병시켜 효율성을 높이고, 낭비를 제거했다. 저수익, 부실사업은 과감히 정리해 부실확대를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이로써 한때 71개까지 늘어났던 포스코 국내 계열사는 38개가 됐고, 해외계열사는 181개에서 124개로 줄었다.

2015년 포스코 해외생산법인의 실적은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당시 최정우 가치경영센터장은 해외법인의 고부가제품의 생산 판매 확대, 현지 정부 및 철강사와의 협력강화를 통한 사업환경의 구조적 개선, 포스코와 해외법인간 협력체제 강화 등 전사적 활동을 전개해 해외생산법인의 생존력 확보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전교 1등 산골 소년의 야망

경남 고성 구만면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최정우 회장은 구만초등학교를 거쳐 회화중학교를 나왔다.

당시 구만면에는 중학교가 없어서 좀 더 큰 면 소재지인 회화면으로 매일 6km씩 걸어서 등교했다.

가난한 농가 형편에 배불리 먹어본 기억이 없는 작은 체구의 아이였지만 초등학교 6년 내내 전교 1등을 한번도 놓친 적이 없고 중학교에 진학할 때에도 수석 입학을 할 정도로 다부진 우등생이었다. 고등학교는 부산으로 다녔다. 부모님께서 매달 보내주시는 쌀 한 말로 큰 집에 신세를 지며 수학했고, 동래고등학교를 거쳐 부산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다들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인데다 농사 밖에 모르시던 부모님 밑에서 학업에 매진하기는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가 끝나면 소 풀 먹이러 산으로 들로 다녀야 했고 소가 풀을 뜯는 동안 짬짬이 책을 보거나 밤에 초롱불을 켜두고 공부했다. 힘들게 자라온 어린 시절 기억은 지금까지 남아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단돈 천원이라도 주고 가야 마음이 편했다.

# 최정우를 쓰다듬던 손, 포항제철소 착공식 버튼 누르다

1970년 3월 경남 고성군 회화면 회화중학교 입학식날 운동장으로 흙먼지를 날리며 헬기 한대가 내려앉았다. 고성의 자랑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가 온 것이다. 바로 수석 입학생에게 상장을 주기 위해서였다.

얼굴이 까맣고 키 작은 최정우 소년은 당시에는 짐작도 못했지만 포스코와의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김학렬 부총리는 최정우 소년에게 상장을 준 그 손으로 한달 뒤 포항제철소 착공식 버튼을 누른다.

김 부총리는 포스코 전신인 포항제철의 산파역을 맡았다. 한일각료회담 참석차 일본으로 가는 김 부총리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포철 자금이 합의 안 되면 돌아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대일 교섭 초창기 일본 관료들이 한국의 신생 제철소를 ‘쓰루제철소’라고 불렀는데, ‘쓰루’란 학(鶴)의 일본말로 김학렬 부총리의 ‘학’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신입사원 최정우, 사진 속 김학렬 부총리와 재회

1983년 1월 대학 졸업을 앞두고 포항제철에 입사한 최정우는 홍보센터에 걸린 커다란 흑백 사진 속 낯익은 인물을 보고 머리를 쿵하고 얻어맞은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자신의 우상이었던 김학렬 부총리가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사장과 함께 당당하게 포항제철소 착공식 버튼을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13년전 중학교 입학식때 상장을 받은 인연으로 여름방학이면 군내 우수 학생들과 함께 ‘뉴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고향집에 초대해 합숙훈련도 시켜준 고마운 분이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부산에서 다니면서 잠시 잊었던 자신의 우상을 여기에서 만나다니… 10여년전의 인연이 필연이 돼 자신을 여기로 이끈 것은 아닐까?’

신입사원 최정우는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중압감과 알 수 없는 책임감으로 연수원의 첫 밤을 고스란히 지새웠다.

▲ 지난 27일 최정우 제9대 포스코 회장이 취임식 후 포항제철소 2고로 현장을 방문, 직원들과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소통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 지난 27일 최정우 제9대 포스코 회장이 취임식 후 포항제철소 2고로 현장을 방문, 직원들과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소통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포스코 회장을 꿈꾸던 신입사원

1983년 입사할 때만 해도 경기가 좋은 편이라 친구들은 주로 종합상사나 건설회사에 취직을 많이 했다.

당시 포항제철은 봉급은 많지 않았지만 복지정책이 좋고 안정된 직장이라는 소문이 났고, 국가 기간산업이라 부모님들도 은근히 권유했다.

그의 입사 동기생은 75명이었다. 신입사원 교육 때는 학생장이 다른 동기생이었으나 부서에 배치받은 이후 동기회에서 동기회장을 하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앞장을 서야할 것 같았다. 동기회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나중에 회사 회장이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지금까지 동기회장을 맡고 있는데 동기생들은 말이 씨가 됐다며 “회장이 되겠다고 하더니 진짜 회장이 됐다”고 놀라움으로 축하를 대신해 줬다.

#사외이사 마음 움직인 2권의 노트

지난 4월 18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권오준 회장이 사임한다고 했다.

포스코 역사상 한번도 임시주총을 한 적이 없던 터라 충격적이었다.

그날 밤은 입사첫날 때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회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불현듯 틈날 때마다 메모해뒀던 노트가 생각났다. 올해 초 포스코켐텍 사장으로 명령이 났을 때 본인의 생각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걱정과 위로를 들었다.

고마운 일이지만 정작 본인은 겸연쩍었다. 포스코켐텍은 포스코그룹이 차세대 먹거리 사업중 하나인 에너지저장소재를 책임지는 회사인데다 평판도 아주 괜찮은 회사라 그 회사의 대표는 모사 사장만큼이나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3년 가까이 그룹내 구조조정에 심혈을 기울이다보니 심신이 지친 측면도 있고, 또 참모로서 한 분야를 깊이있게 보는 것보다 작은 규모지만 대표로서 회사 전반을 총괄하는 경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포항에서 등산도 하면서 체력도 보충하고 CEO로서 안목도 넓혀볼 참이었다. 그러면서 차근차근 포스코에 36년을 몸 담으면서 각 분야에 개선했으면 좋은 점, 최근 회사를 둘러싸고 있는 우려에 대한 해결책, 타사에서 배웠으면 하는 점을 매일매일 정리했다. 이대로 계열사에서 직장생활을 마감한다면 포스코켐텍 사장 후임자에게 전해줘도 좋고, 포스코로 다시 돌아가거나, 더 큰 기회가 온다면 업무에 큰 도움이 될 성 싶었다.

그러나 갑자기 권오준 회장이 사임을 발표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포스코를 잘 이끌어야 하고 어려울 때 힘을 보태려면 아이디어 노트도 완성도가 높아야 할 것이었다.

그때부터 외부 출입을 자제하고 포스코의 시대적 소명과 비전을 좀 더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경영쇄신방안, CEO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조직문화, 사업계획, 대북사업, 사회공헌 등 분야별로도 전략안을 만들었다.

포스코켐텍으로 옮긴 지 4달여, 권 회장 사임 발표 후 2달여 지난뒤 최정우의 경영 아이디어 노트는 더 두껍고 촘촘해졌다. CEO후보추천위원회에서 면접대상자로 결정되었을 때 사외이사들의 마음을 움직인 2권의 노트가 완성된 것이다.

#건강한 리더, 건강한 리더십

90년대 초반 주말도 없이 일에만 파묻혀 지내다보니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된 적이 있었다. 고지혈증이 찾아와 간경화로 발전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것이다.

‘이런 몸 상태로 일이나 계속 할 수 있겠나’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그 길로 매일 아침 북부해수욕장 모래사장을 뛰었고 지금도 건강관리라면 누구보다 철저하다. 등산, 자전거 등 건강한 취미 생활도 하나 둘 만들었고, 사무실까지 계단을 이용해 오르내리기를 생활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건강관리를 혼자만 하지 않는다. 임원들이나 그룹장, 팀장들과 주말 등산을 함께한다.

올초 포스코켐텍 사장으로 옮겨간 후 “리더가 건강해야 현장 곳곳을 다니며 직원들의 안전을 지킬수 있다”면서 연말까지 계획을 짜놓고, 매월 1회 전 임원 및 그룹장들과 등산을 해왔다.

리더가 건강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리더십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쳤기에 직원들의 건강 관리에 발벗고 나서게 된 것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서든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참되게. 최정우 회장의 36년 철강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조직에서 어떤 일을 맡게 되든 주인의식을 가지고 사명감과 책임감을 다하면 내가 있는 위치가 진리, 참된 것이라는 뜻이다.

최정우 회장이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준점으로 삼아 온 좌우명이자, 신조다.

어느 회사든 비슷하지만 과거에는 모기업에서 계열사로 이동할 때는 낙담하고 계열사에 있다가 퇴사할 것으로 생각하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정우 회장은 처음 계열사 포스코건설로 발령이 났을 때에도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보자고 생각해서 건설분야 공부에 매진했다.

당시 최 회장은 포스코건설의 경영전략실장으로 부임했는데, 모든 임원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임원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참석했다.

본인이 마음을 열어야 다른 임원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건설화되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한 것이다. 2년 후 기회가 돼 포스코에 돌아왔고 4년 뒤에 포스코대우로 발령이 났을 때도 같은 마음으로 포스코대우화되기 위해 팀장이상 부장들과 자주 소통했다.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 회장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직장인의 자세며, 후배들에게도 그런 리더가 되기를 주문하고 있다.

/김명득기자 mdkim@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