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며느리밑씻개’라는 이름을 가진 한해살이풀이 있다. 다른 식물이나 물체를 휘감으면서 자라는 덩굴식물이다. 한국과 일본, 중국에 분포하는데, 용정과 연길, 백두산 부근에서도 며느리밑씻개를 본적이 있다. 그때 느낀 식생(植生)의 친근한 기억은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생활습관과 언어와 풍습은 적잖게 달라졌으되, 풀과 나무와 꽃은 옛날과 다름없다는 기쁜 확인.

하지만 풀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괴이쩍음은 이내 우울한 심사로 전환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느리밑씻개는 날카롭고 뾰족한 가시가 빼곡하게 달린 줄기를 가진 풀이다. 앙증맞게 생긴 연홍색 꽃잎과 달리 찔리면 날카로운 통증을 유발하는 가시줄기의 며느리밑씻개. 사악한 시어미는 힘없는 며느리에게 정말 그걸로 밑을 씻으라고 했을까?!

사전을 보면 북한에서는 이 풀을 ‘사광이아재비’라 부른다. ‘사광이’는 살쾡이, 즉 ‘삵’을 의미하고, ‘아재비’는 아저씨를 뜻한다. 따라서 삵처럼 매서운 풍모(風貌)와 맛을 가진 풀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 ‘사광이아재비’다. 이것을 식민지 조선시기에 일본인들이 악의적으로 며느리밑씻개로 개명(改名)하면서 이름이 일반화됐다는 설이 있다.

오늘날에도 위세를 떨치는 고부간의 갈등과 대립은 조선시대에는 더욱 우심했을 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을 비하하고 놀리는 의미로 며느리밑씻개라는 이름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혹자는 이 풀이 부인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 며느리를 지극히 사랑한 시어머니의 남다른 배려에서 며느리밑씻개라는 이름이 유래됐다고 말한다.

이름은 인간을 포함한 각종 생물과 무생물의 형식과 내용을 규정하는 기본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대상과 자아의 관계가 성립돼 유의미하게 전이되어 나감을 드러내는 징표다. 우리는 싫어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의 이름을 허투루 부르지 않는다. 외려 그런 사람의 이름을 왜곡하거나 부정적인 별명으로 폄하하기를 즐긴다. 어린 시절 맘에 들지 않는 친구들을 악의적인 별명으로 곯려준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언제부턴가 병원에 갈라치면 얼굴이 찌푸려지곤 한다. 간호사들이 ‘아버님’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던 시절에 ‘아버님’이라 불리는 일은 고문(拷問)이나 다름없었다. 정색하면서 아버님 호칭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그때뿐이다. 그이들은 고객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뜻에서 그리 부른 것 같은데, 듣는 나는 영 찜찜하다. 아이들도 이제는 장성했지만, 아직도 ‘아버님’ 호칭은 어색하고도 불편하다. 아직 며느리를 맞을 준비가 아니 된 탓이다.

정치의 출발점을 물은 자로(子路)에게 중니(仲尼)는 말한다. “이름을 바로 하겠노라! 必也正名乎!” 실망하는 낯빛의 중유(仲由)에게 공자는 육단논법으로 자신의 사유를 펼쳐 보인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탄치 못하고, 말이 순탄치 못하면 일이 이뤄지지 못하고, 일이 이뤄지지 못하면 예와 악이 발흥하지 못하며, 예와 악이 발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올바르지 못하고, 형벌이 올바르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 (논어·자로 편)

어떤 이는 ‘명(名)’을 명분이나 명분에 맞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되 나는 단출하게 ‘이름’으로 새긴다. 이름은 요긴하고 필수적인 요건이다. 나와 우리를 둘러싼 그대와 당신들 또는 그들의 관계는 대저 이름에서 유래한다. 하나의 대상에 지극한 이름을 부여하고, 그것을 온전히 부르고 소중히 간직하는 것에서 매사(每事)는 출발한다.

요즘처럼 한국사회 전반에 거대한 전변(轉變)과 전환의 요구가 빗발치는 시기에 우리는 이름과 명칭 혹은 호칭에 유의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그만큼의 언어로 불리는 대상과 관계설정이 종요로운 시점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