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 희

아득한 허공에서 비는

좌천도어 산동네 흑백사진의 저녁으로 내리네요

내리면서 어두워지는 비는

작은 허공들입니다

이마에 찬 허공이 닿습니다

사글세 낮은 지붕 흐린 골목에

허공이 켜집니다

시멘트 길 틈 사이에 개망초 잎사귀

누나를 기다리다 잠든 아이의 얇은 잠 단칸방 지붕으로

전신주 옆에 오래 혼자 서 있는 사람의 우산 속에도

허공 하나씩 켜집니다

등나무 줄기를 타고 내리다가

등꽃에 맺힌 허공 하나

우산을 치우고 쳐다보는 내 눈 속으로

툭 떨어집니다

허공 속에 들어와 젖는 세상

등꽃이 핍니다

가난한 산동네 골목, 오래 쌓인 가난과 서러움 안으로 비가 내린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적시고 그들의 핍진한 생을 위로하듯이 타오르며 보라색 고운 꽃 타래를 피워올리는 등꽃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쓸쓸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내리는 데마다 만들어지는 허공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가슴 속에도 비가 내리고 있을 것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