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서예가
▲ 강희룡서예가

조선 개국 초부터 선조 때까지 약 200년간 역대 왕들의 가장 큰 현안은 ‘대명회전, 조선국조(朝鮮國條)’의 주에 명 태조의 유훈이라 해서 ‘이인임의 아들 단(旦:태조 이성계)이 사왕(四王:공민·우왕·창왕·공양)을 시해했다’고 잘못 기록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종계(宗系)를 바로 잡는 것이었다. 조선이 개록(改錄)을 주청했으나, 시정 약속만 하고 실현되지 못해 두 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문제로 이어져왔다.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종계를 바로잡는 종계변무가 외교의 최대 이슈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과 역관을 파견했으나. 뚜렷한 결실을 얻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중기에 활약한 역관 홍순언(洪純彦·1530~1598)이 등장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사역원(司譯院)을 두어 역관을 배출했는데 ‘통문관지’는 조선 숙종 때 서역원의 역관인 김지남과 그의 아들 김경문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책으로 ‘인물’이란 항목을 설정해 최세진, 홍순언, 김근행 등 역대의 주요 역관들을 서술하고 있는데 다음은 홍순언의 행적을 발췌한 것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젊어서 불우했으나 의롭던 홍순언이 일찍이 연경에 가다가 통주에 이르러 밤에 청루에서 노닐다 자색이 매우 뛰어난 한 여인을 보고 마음에 들어 주인에게 부탁해 접대하게 했는데, 소복을 입고 있자 이유를 물으니 부모가 연경에서 벼슬하다가 돌림병에 걸려 동시에 돌아가셨는데, 혼자서 고향으로 모셔가 장사지낼 밑천이 없으므로 스스로 몸을 판다고 하며 눈물을 흘리자, 공이 듣고 불쌍히 여겨 그 장례비 3백금을 주고 끝내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여자가 이름을 물었으나 끝내 말하지 않고 성만 알려줬다.

이 여인은 후에 예부시랑 석성의 계실이 됐는데, 시랑은 이 일을 듣고서 그의 의리를 높이 여겨 조선의 사신을 볼 때마다 반드시 홍통관(洪通官)을 찾았다. 당시는 조선에서 종계변무 때문에 전후 10여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모두 허락받지 못하고 있었다. 1584년에 공이 변무사 황정욱을 따라 북경에 이르렀을 때, 예부시랑 석성과 그의 부인을 함께 만났다. 부인의 요청으로 홍순언을 찾고자 했던 석성과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홍순언은 그동안 조선이 그토록 원했던 종계변무의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석성의 부인은 홍순언에게 보은의 비단을 짜서 보냈다. 그리고 ‘보은단동(지금의 소공동, 북창동)’의 유래가 홍순언과 중국 여인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록했다. 이 인연은 임진왜란 때 원병을 파병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석성은 왜란 당시 병부상서의 자리에 있었고 홍순언과의 인연을 생각해 명의 원병파병에도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마지막 대목은 홍순언이 인연으로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광해군 때부터 중국 사신에 대해 뇌물을 쓰는 풍조가 생기면서 외교적 폐단이 시작됐음을 통문관지는 기록하고 있다.

홍순언에 관한 일화는 성호사설, 열하일기, 이향견문록 등의 주요 기록에도 널리 소개됐다. 각각의 내용상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홍순언의 인연이 외교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는 부분은 공통적인 요소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행태는 우리의 공동체를 수렁으로 몰아넣는다. 일례를 보면 비서 성폭행으로 첫 공판을 받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혐의를 부정하며 ‘이성적 감정에 따른 것’이라 형법상 범죄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염치가 없다면 못할 짓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의 하나로 염치를 꼽는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조건 환경과 시선에 얽매여 자신의 소신을 왜곡해서는 안 되겠지만,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의 기본 질서와 도리를 파괴하면서 나 자신만 옳다고 주장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