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의수<BR>전 포스텍 교수
▲ 서의수 전 포스텍 교수

여름이 본격적으로 무르익어 간다.

여름은 인생으로 말하면 20대 초부터 40대 중반까지 약 20여 년 간일 것이다. 이제 어엿한 성인(成人)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자리잡기 시작한다. 결혼도 하게 되고, 자녀를 포함한 가족 부양도 하게 될 것이다.

오늘은 결혼과 결혼식에 대해 생각해 본다. 먼저 결혼은 개인적인 선택이며, 제3자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할 수 없음을 우리는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결혼 상대를 구하는 첫 관문인데 바로 이 시작점부터 문제가 걸린다. 지난 칼럼에서 돈, 명예, 어떤 타산에 끌려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배우자를 찾으라고 필자는 권하였다. 부부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서로 받으려고 또는 받기를 요구하는 결혼은 행복하기 어렵다. 서로 주고자 하는 진정한 사랑으로 결합된 부부는 행복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다. 주는 즐거움과 받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무촌(無寸)들이 사랑으로 결합하고 그 사랑이 승화되어 하나의 무촌으로 변신한다. 아름다운 기적이다.

인생사 전반에 걸쳐, 내 이익만 차리려고 결정하면 대부분 후회스런 결과를 경험하는 것이 세상 이치인 듯하다. 물질적, 세속적 타산으로 결코 무촌으로서의 행복한 가족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혼식 준비에도 문제가 많다.

한국에서는 먼저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다. 내 원하는대로 할 수 없다. 왜 그럴까? 결혼은 젊은 자녀들이 하는데, 결혼식은 부모들이 시켜주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결혼식은 결혼하는 젊은이들의 결혼식이 아니다. 부모들의 결혼식이다. 하객들도 주로 부모들과 관련된 분들이다. 그러니 부모들의 재력과 사회적 권력을 과시해야 한다. 결혼 쌍방의 부모들끼리도 눈치를 살펴야 한다. 결혼식장에서 부모들의 권위가 서야 한다. 얼마나 많은 하객들이 오는지, 어떤 하객들이 오는지, 화환들은 얼마나 진열되는지, 축하금은 얼마나 들어오는지. 모든 것이 물질적이고, 외형적이다.

10년 전 쯤에 어느 유명 대학 총장의 아들 결혼식에 간 적이 있었다. 한국 관습을 몰라 보통 축하금을 얼마나 하는지 지인에게 물어보니, 그는 ‘사회 계급에 따라 축하금이 다르다’고 하면서 금액들을 가르쳐 주었다. 축하금을 들고 결혼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저절로 내 입이 크게 벌어졌다. 입구에 화환들이 그처럼 넓은 로비를 완전히 둘러 진열하고도 모자라 연결된 공간으로까지 넘쳐 흐르고 있었다. 내 추산으로는 화환이 수 백개 되었다. 화환 하나에 십만원이라면 모두 수천만원이 단지 몇 시간을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각 화환에 누가 보냈는지 씌어있는 것을 보고 또 놀랬다. 개인들의 이름 앞에 소속 기관과 직함이 크게 씌어져 있었다. 큰 기관장, 직책 높은 사람들의 화환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 얼마나 개인 돈으로 그 화환을 보냈을까? 화환을 보내는 동기는 무엇일까?

한 번은 다른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결혼식장을 향하여 부지런히 걷고 있었는데, 지인이 반대편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자기는 참석할 시간이 없어 ‘눈도장’ 찍고 간다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일순간 멈칫하다가 말의 뜻을 짐작하고, ‘바쁘다며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다 가는가’ 물으니 그래도 결혼하는 젊은이 부모들에게는 인사는 해야 하고 축하금도 손수 전하는 것이 예의라고 그는 말하고 달아나듯 뛰어갔다.

결혼식의 초점은 ‘결혼을 시키는 부모들’이 아니라, 결혼당사자들이 되어야 한다. 결혼당사자의 가족, 친지들, 친구들이 참석하면 족하다.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 악수하고 끝날 부모 친구들이 왜 주객들이 되어야 하는가? 결혼식과 관련된 허례허식적이고 낭비적인 풍습은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앞날의 행복한 가족을 이루는데 해로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