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영원한 밤’

김인숙 지음·문학동네 펴냄
소설집· 1만3천원

▲ 김인숙 소설가. /문학동네 제공

“내게 이 소설들은 시간이다. 지나가는 것, 흘러가는 것. 거기, 멈춰 있는 것. 조용한 문장을 쓰고 싶었으나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지 못할 때가 많았다. 혼자 쓰는 글보다 혼자 하는 말이 더 많아졌다. 질문들. 부당한 것에 대해. 여기, 나, 사람들.”

김인숙(55) 작가가 신작 소설집 ‘하루의 영원한 밤’(문학동네)을 출간했다.

제12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빈집’을 비롯해 표제작과 ‘델마와 루이스’, ‘빈집’, ‘토기박물관’,‘아홉번째 파도’ 등 8편이 담겼다. 올해 등단 35년을 맞은 작가의 원숙한 세계를 보여준다.

등단 이후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방황과 자유에 대한 희구를 그렸던 작가는 이후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작품으로, 개인의 삶을 세밀하게 응시하는 작품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갱신해왔다.

이번 소설집은 삶의 매서운 진실을 묘파해내는 김인숙 소설의 매력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작가가 새롭게 개척해나가고자 하는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는 평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페미니즘 로드무비의 통쾌함과 뜻밖의 스릴러적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최근 김인숙 소설의 특별한 변화”라고 설명했다.

표제작 ‘단 하루의 영원한 밤’에는 노쇠해 정신이 점차 혼미해져가는 노교수가 등장한다. 삼십 년 전 어느 하루의 일탈로 제자에게 사생아를 낳게 한 뒤, 제자가 아니라 자신이 받아야 했던 모욕과 평생을 싸워온 그에게 남은 기억은 이제 삼십 년 전 그날 하루뿐이다. “최후의 생존을 위해 남겨놓을 수 있는 만큼만 남겨놓은” 그 기억을 붙든 채 노교수는 희미한 숨을 쉬고 있다. 삶을 감내하다가 결국 스러져가는 노교수를 지켜보는 또다른 제자 ‘그’의 삶에도 창피하고 모욕적인 순간들이 얼룩처럼 묻어 있다. 어느 밤, ‘그’는 자신의 삶과 노교수의 삶을 겹쳐 보기 시작한다. 생의 통증을 느낀 그 밤이 노교수의 마지막 기억처럼 사는 동안 영원히 반복될 것이고, 자신은 그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델마와 루이스’는 아흔이 가까운 나이의 두 자매가 가출을 감행해 바다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제목에서 보듯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소설은 영화와 달리 두 주인공을 노인으로 설정함으로써 노년의 삶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델마와 루이스가 중년의 식당 여자와 그 여자의 딸을 만나 이뤄내는 여러 세대 여성들 간의 유쾌한 연대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델마와 루이스의 자식들은 노년의 일탈을 황당해하기만 할 뿐 이들이 왜 가출했는지는 영영 알지 못하고, 소중한 비밀을 간직한 자매의 마지막 여행은 우리에게 뭉클한 여운으로 남는다.

‘빈집’은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남편에게 증오심을 느끼곤 하는 한 여자가 그럼에도 삶을 그러안기로 결심하는 결말 뒤에 남편의 충격적인 비밀을 덧붙인다. 여자가 본 남편의 모습은 극히 일부일 뿐이며, 남편이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 또한 사랑만은 아니라는 것. 소설은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비밀의 무한성을 독특한 공간으로 형상화하면서 비밀에 의해 일상이 유지되는 역설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토기박물관’은 영어학원에 같이 다니는 나이든 여성 ‘미라’와 ‘제니’가 어느 오후 우연히 토기박물관의 전시를 관람하게 된다는 단순한 줄거리로 요약되지만, 읽다보면 곧 정밀하게 계산된 구성임을 체감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노년 여성의 가벼운 히스테리처럼 읽고 지나온 문장들이 어느새 사랑과 고독의 증세로 다시 읽히면서, 문장 하나하나가 결말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단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김인숙 작가는 20살때인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해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받았다. /윤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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