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여인들 ①

▲ ‘여권’이 생각 이상으로 신장됐던 신라. 그 나라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과 그녀의 사촌이며 2번째 여왕으로 역할했던 진덕여왕이 함께 자리한 모습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표현했다. /삽화 이찬욱

“여자여,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브라질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 (Paulo Coelho)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자신의 소설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통해서다. “(여자는) 한 줌의 씨앗, 길들일 수 없는 바람, 영혼을 태우는 불길, 세계의 기원, 그리고 사랑입니다.”

세상 모두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예술가 코엘료처럼 멋지고 시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온 역사 속에서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역할을 수행해왔다는 명제는 이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보편화됐다. 그렇다면 빛나는 문화와 불교예술을 꽃피운 ‘천년왕국 신라’의 여인들은 어떠한 인생을 살았고,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을까?

본지는 3명의 여왕(선덕·진덕·진성)과 비밀스런 풍문 속을 떠도는 1명의 여인(미실), 화랑의 전신(前身)으로 이야기되는 원화(源花)를 이끌던 2명의 여성(준정·남모) 등 신라시대 여인들의 삶과 죽음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남성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 속에서 이들을 재발견하고자 준비된 이번 기획기사는 10회에 걸쳐 연재된다. /편집자 주

신라시대 드높았던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활동… 정치참여·권세장악도 어렵잖아
진평왕 딸 선덕여왕의 통치 15년은 남성왕 이상으로 국가적 힘 키워내

한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에 대한 탐구는 같은 시대의 남성 탐구인 동시에 ‘인간 보편’에 관한 연구와 다를 바 없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사람들이 적지 않은 편견과 선입관에 빠져있음을 알게 된다. 신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그마치 1천500년 전에 존재했던 옛 나라이니 분명 여성 인권이 형편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그런 선입관 중 하나다.

그러나 ‘현상·해석학적 교육연구’에 게재된 하현진의 논문 ‘화랑세기(花郞世記)에 나타난 신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활동’은 위와 같은 편견을 뒤엎는다. 아래 논문의 요약본을 보자.

“우리는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온순하고 순종적으로 생활하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곧잘 떠올린다. 그러나 유교사회 이전의 신라 여성들은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았고, 공적인 영역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신라사회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이유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풍백(風伯·바람을 다스리는 신으로 연구자에 따라 여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 속에서 하현진은 구체적으로 신라 여인들이 어떤 권한을 행사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핵심을 알려주는 내용이기에 그대로 인용한다.

“풍백은 환웅(桓雄·단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화 속 인물)과 더불어 개벽 실현에 참여하며 동등한 입장을 보여주었다. 풍백의식을 계승한 신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활동은 ‘화랑세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신라사회는 마복자 제도, 삼서제 등을 통해 성적으로 자유롭고 개방돼 있었으며, 부부 관계에서도 여성이 남성에게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미실은 색공(色供·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육체를 바치는 행위)을 통해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풍월도와 관련해서도 여성들이 우두머리 원화가 되기도 하고, 경쟁을 거쳐 권세를 장악하기도 했다. 또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왕위를 계승하기도 한다.”
 

▲ 1천년 ‘신라 역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여인인 동시에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미실. 아름다움과 현명함을 동시에 가졌던 보기 드문 여성이다.  /삽화 이찬욱
▲ 1천년 ‘신라 역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여인인 동시에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미실. 아름다움과 현명함을 동시에 가졌던 보기 드문 여성이다. /삽화 이찬욱

◆ 신라, 여왕들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렇다면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라의 통치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은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져 있을까.

먼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진 군주로 기록된 선덕여왕(재위 632∼647)은 진평왕의 딸이다. 그녀가 정치력을 행사한 15년의 기간 동안 신라는 남성 왕이 지배하던 시절 이상으로 국가의 힘을 키웠다.

인품이 자애롭고 미모 또한 빼어났다고 전해지는 선덕여왕은 중국과의 정치적 불화 속에서도 현명하게 처신해 신라를 외부적 위험으로부터 지키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으로서는 행복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화랑세기’는 선덕여왕이 “2명의 남자와 3번에 걸쳐 결혼생활을 했으나 아이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선덕여왕의 사촌인 진덕여왕은 ‘비담(毗曇)의 난’ 와중에 선덕여왕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신라의 통치권자가 된다. 재위기간은 647년부터 654년까지. 높은 인기 속에 방영된 드라마를 통해 진덕여왕의 이름이 ‘승만(勝曼)’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

성골 출신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의 아버지는 진평왕의 동생인 진안갈문왕이고, 어머니는 월명부인 박씨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드라마와는 판이한 모습으로 진덕여왕의 외모를 묘사한다. 어찌 보면 기이하기까지 하다. “여왕의 자태는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나 키가 7척이나 되었고, 늘어뜨리면 무릎 아래에 닿을 정도로 팔이 길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 경주는 몇 해 전 수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지다.
▲ 경주는 몇 해 전 수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지다.

◆진성여왕과 원화는 ‘악녀’로 떠돌지만…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몇몇 사료들을 살필 때 큰 지탄과 오해 속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으니 바로 ‘진성여왕’과 ‘원화’이다. 먼저 진성여왕을 설명하는 책의 한 대목을 보자. 다음은 경상북도가 간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에 등장하는 진성여왕에 대한 서술이다.

“결국 신라는 9세기 말 진성여왕 시기에 터진 지방사회에서의 농민 반란을 계기로 각 지역의 유력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립하면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 표현은 여왕의 무지와 무기력이 왕조의 숨통을 끊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진성여왕은 “정치적으로 무능력했던 동시에 음란하기까지 했다”는 학계의 공격을 받고 있다.

‘화랑세기’에 그 원형을 드러내는 원화도 그렇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원화를 이끌던 ‘준정’과 ‘남모’라는 신라 여성을 향해 “질투심과 시기가 이 조직을 붕괴시켰다”고 힐난한다.

그런데 정말로 진흥왕 3년(576년) 효도·우애·충성·신의를 모토로 만들어진 원화가 단순히 여성이 주도했다는 사실만으로 무너졌을까? 여기서 ‘역사적 호기심’은 새끼를 친다.

‘멕시코에서 가장 잘난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였던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 ‘당대 최고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1864~1943),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사회주의 혁명의 불길 속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저평가 받았던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1871~1919)를 떠올려보면 신라 여성들에 관한 평가 역시 지나치게 인색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것이 남성이 주도해온 것이건, 여성을 중심으로 펼쳐진 것이건 역사의 궤적을 따라가는 일은 그래서 의미가 적지 않은 게 아닐까.

▲ ‘미실’은 비밀의 베일 속에 숨겨진 한 여성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 ‘미실’은 비밀의 베일 속에 숨겨진 한 여성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스터리한 신라 여인’ 미실의 삶과 죽음에 세밀하게 접근한 김별아 역사소설 ‘미실’

‘성 행위’를 무기로 왕조를 농락한 여성, 아름다움 하나로 수십 명의 왕족과 귀족을 쥐락펴락한 팜므 파탈(Femme fatale·치명적 악녀), 비교 대상이 드문 사악한 여자…. 신라시대를 살았던 미실(美室)에게 덧씌워진 혐의들이다. 그러나 이걸 전해오는 ‘소문’ 그대로 받아들여 이해하는 게 올바른 방식일까?

소설가 김별아(49)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됐다. 2005년 한국 문학상 역사에서 전례가 없던 1억 원이란 상금을 걸고 공모된 ‘세계문학상’. <미실>은 그 상의 첫 번째 수상작이다. 김별아는 “내가 장악할 수 없는 인물,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시기”에 미실을 만났다고 고백했다. 또 그녀를 통해 “훈련받은 도덕을 뛰어넘고, 내가 알고 있는 조잡한 역사 지식을 당당히 배반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이 진술은 김별아의 작가적 열망인 동시에 시대는 다르지만 같은 여성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허위허위’ 살아온 동성(同性) 미실에 대한 연민에도 닿아 있는 듯하다.

성적 차별과 압박에서 벗어난 남성으로 살았기 때문일까. ‘미실’을 접한 작가 박범신(72)이 내놓은 평가는 후하고도 여미하다.

“남성과 달리 여성은 신 또는 우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 그녀들은 본래부터 창조적 생산성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화랑세기’라는 고서(古書), 혹은 공중파 방송국이 만들어낸 대중적 드라마 한 편으로는 ‘존재했던 한 인간’의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는 게 정한 이치. 오늘을 사는 누구도 보지 못했고, 볼 수도 없었던 미실의 굴곡 도드라졌던 삶과 죽음이라면 더 그렇다. 이때 필요한 것이 ‘예술가의 상상력’이다.

▲ 역사에 관심을 가진 여행객들이 선덕여왕릉 입구에 세워진 안내문을 꼼꼼하게 읽고 있다.
▲ 역사에 관심을 가진 여행객들이 선덕여왕릉 입구에 세워진 안내문을 꼼꼼하게 읽고 있다.

김별아는 이를 십분 활용해 이런 문장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그녀의 치마가 펄럭였을 때 세상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돌이킬 수 없는 폐허처럼,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갔다. 그곳에 검붉은 아가리를 쩍 벌린 단애(斷崖)가 오롯이 자리함을, 발끝이 흔들리는 아슬아슬함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이미 1천500년 전에 ‘유사 페미니즘(Feminism)‘을 삶의 안팎에서 구현한 특이하고 돌올했던 여성.

미실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가 미진했던 것은 단순히 왕조 중심의 사관(史觀)과 ‘남성 주인공’을 향한 과도한 주목 탓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그녀가 주목할 만한 시대사적 가치를 가지지 못했던 것일까?

이러한 제반의 궁금증은 향후 장편소설 ‘미실’을 쓴 김별아를 만나 심층 인터뷰로 풀어보고자 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