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을 모르는 한국인이 있을까?

눈먼 아버지를 위하여 공양미 삼백석에 몸 팔려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이야기….

춘향이야기와 함께 설화, 고전소설, 판소리, 또는 신소설로 장르 변화하면서 우리 문학사와 발전해온 심청이야기….

고전소설 속의 심청은 조선시대의 유교이데올로기의 산물인 효의 상징이지만 황석영은 심청의 이야기에서 팔려가는 여성이라는 데 주목한다.

여성의 팔린 몸은 곧 매춘이라는 코드로 변한다. 당대 가장 뛰어난 작가들에게 포착된 심청은 더 이상 아버지를 위해 몸을 판 효녀가 아니다.

이해조, 채만식, 최인훈, 이청준 등에게서 다시 쓰인 적이 있는 이 유명한 심청의 모티브는 다양하게 변주된다.

때로는 여성의 몸과 인격을 상품화했던 심청의 삶에서 여성의 수난, 혹은 그것을 강요당한 민족의 수난으로 치환되어 쓰였다.

특히 채만식과 최인훈의 경우가 그러하다. 채만식은 팔려가는 딸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심봉사의 회한과 분노로 심청전을 다시 썼으며, 최인훈은 심청의 용궁 체험을 청루의 매춘 체험으로 재설정한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서 심청의 수난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심청이 황석영에 의해 새로 태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심청전 다시 쓰기가 황석영이라는 걸출한 이 시대의 이야기꾼에 의해 다시 쓰인 것이다.

황석영의 심청은 고전에 나온 것처럼 중국 상인들에게 제물로 팔려 인당수에 빠져 죽지도 않고 용궁에도 가지 않는다.

대신 조선의 해안가에서 이국 상인들에게 거액에 팔리는 한 소녀의 운명을 구현하고 있다. 그 소녀는 ‘효’의 상징이 아니라 여러 나라를 돌며 몸을 파는 창부(娼婦)가 된다. 소설은 동아시아에 밀려들기 시작한 근대의 격랑을 온몸으로 감내하는 한 여자의 몸과 마음의 변전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기구한 여자의 일생은 19세기 동아시아의 벌거벗은 역사가 된다. 타의에 휘둘리는 그 역사는 심청이라는 가냘픈 여자의 몸에 고스란히 기록된다.

19세기 말 황해도 황주 땅에 태어난 심청은 그러나 바닷물에 수장되지 않는다.

뱃사람들이 허수아비에 심청 이름을 써서 바다에 던져버린 뒤, 열다섯의 청은 ‘롄화(蓮花)’라는 이름으로 낯선 삶을 헤쳐간다. 중국 난징의 늙은 부호의 첩으로 팔려나간 뒤, 그가 죽자 기루(妓樓)에 들어간다. 악사 동유를 만나 처음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지만, 납치돼 대만의 밑바닥 창녀로 전락한다. 영국인 제임스의 눈에 들어 싱가포르에서 그의 부인 노릇을 하다, 안락한 삶을 스스로 걸어나와 오키나와에서 주점을 연다.

왕실 귀족인 가즈토시의 부인이 되어 행복한 삶을 누리지만, 오키나와의 지배권을 행사하던 일본 사쓰마번(藩)의 횡포로 남편이 처형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샤들의 ‘마마상’으로 변신한다. 이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질적인 문명의 침입을 받은 동아시아 주민 전체의 초상이기도 하다. 열다섯 살 여자아이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여든의 노파가 되어 있었다.

심청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중국 난징에서 진장, 대만, 싱가포르, 일본의 류큐, 나가사키로 옮아가며, 그동안 ‘렌화’ ‘로터스’ ‘렌카’ 등 여러 이름을 가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편전쟁이나 태평천국,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민란, 동학과 청일전쟁·러일전쟁 등이 중첩된다. 심청은 자신을 거쳐가는 남자와 근대화의 바람 등의 교섭을 통해 바깥세상의 갈등을 보여준다.

심청은 선굵은 남성적 서사를 즐겨 쓴 황석영의 소설 중에서 내러티브의 주체가 ‘여성’인 특별한 케이스다.

<위덕대 국문과 이정옥 교수>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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