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살며 생각하며 ⑬

현재는 과거 없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현재는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를 반드시 되돌아보게 한다.

요즈음에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의 한국 문학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방법을 ‘고안’ 중에 있다. 그 동안 써온 방법으로는 왠지 부족한 것 같아 하는 일이다.

그래서 ‘해방 후 8년사의 문학’처럼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함께 아우르면서 그 사이의 시간까지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하다, ‘전후문학’이란 한국에서 무엇이었느냐를 다시 따져보아야 한다, ‘분단문학’, ‘월북문학’ 같은 개념 외에도 ‘월남문학’ 개념을 새로 도입하는 것도 좋겠다,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다.

월북 작가 김남천의 장편소설을 새롭게 읽은 것도 그 연장선이다. 그는 1945년 10월 15일부터 1946년 6월 28일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에 ‘자유신문’이라는 신문에 장편소설 ‘1945년 8·15’를 연재했다. 비록 미완으로 끝났지만 이 소설은 실제 현실과 불과 한두 달 사이의 간격을 두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야심찬 기획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김남천은 1930년대 후반에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을 해산하지 않을 수 없는 정세 아래서 리얼리즘의 본의를 새롭게 생각하기 위한 발자크 연구 프로그램을 제시한 바 있다.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준 작가로 평가되는 발자크 탐구를 통하여 과연 리얼리즘이란 무엇이며, 카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또는 유물변증법적 리얼리즘)이 결여한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했던 것이다.

이제 새롭게 보는 ‘1945년 8·15’를 통하여 생각한다. 과연 김남천은 발자크를 비롯한 서구 작가들에게서 무엇을 보았던가? 발자크 같은 작가를 연구한 끝에 생각한 리얼리즘의 정신이며 소설의 운명에 대한 생각은 어디로 갔는가? 과연 그가 해방의 감동과 격동 속에서 부여잡은 진보적 리얼리즘은 얼마만한 깊이를 가졌던가?

임화처럼 김남천에 깊은 연민과 동정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그가 한국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월북해 간 곳에서 비참하고도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면서, 한편으로 냉정한 판단력을 잃어버려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만약 카프의 리얼리즘에서 한계를 보았고, 그래서 고발, 자기고발, 모럴, 관찰, 풍속소설에의 길 같은 여러 깊은 모색을 했던 작가였다면 8·15라는 ‘격절’이 있었다 해도 모든 것을 잊고 다시 극복해야 했던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되었다. 단순한 회귀, 반동은 새로운 차원의 문학을 열어 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남북평화 무드는 문학과 문학연구에 다시 한 번 깊은 변화를 요청할 것이다. 만약 종전선언이 현실화된다면, 우리는 이제 ‘전후’가 아니라 ‘전후후’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전후후’는 기묘한 전후후, 전후의 연장이면서 탈연장인 전후후가 될 것이다. 냉정한 이지를 작동시켜야 할 때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