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개화단국대 교수
▲ 배개화단국대 교수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전혜린(1935~1965)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수필집을 읽다가 필자는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했다. 그것은 전혜린이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간도쪽이 보이는 두만강 근처 어느 음식점에서 러시아 여성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글을 통해서 필자는 처음으로 식민지 시대 때는 한국 사람도 육로로 만주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 필자는 대한민국이 섬나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현재의 정전(停戰) 체제는 우리가 한반도와 대륙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북한은 우리의 영토를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는 괴뢰 정권이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을 방문하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 되어 처벌받는다. 이렇게 북한 지역이 갈 수 없는 곳이 되면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중국으로, 혹은 유럽으로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됐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지리적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필자가 국어국문과에 입학하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식민지 시대 때 출판된 문학 작품들을 읽다보면 기차로 만주를 가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심양이나 하얼빈과 같은 곳은 남의 나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고 손기정 선생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할 때 기차를 이용해서 서울에서 독일까지 갔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없는 여행을 식민지시대 사람들은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도 손기정 선생처럼 기차로 유럽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지난 27일 남한과 북한의 두 정상이 발표한‘판문점 선언’에 따르면 남, 북한의 철도가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판문점 선언은 “경의선(서울∼신의주)과 동해선(부산∼원산)을 비롯한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현대화해 활용하기 위한 실천적인 대책을 취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경의선과 동해선은 모두 식민지 시대 때 건설된 철로이다. 이 철로들을 현대화 하고 남·북한의 종전이 선언되고 한반도가 평화체제로 이행한다면 우리들도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갈 수 있다.

또한 경의선과 동해선이 연결되면, 남한 사람들은 백두산도 육로를 이용해서 갈 수 있다. 현재 남한 사람이 백두산을 가려면 중국을 거쳐야 한다. 보통은 인천에서 북경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거기서 고속 기차나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연변에 간다. 아니면 대련이나 심양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거기서 버스나 기차를 이용해 백두산에 간다. 이렇게 불편하게 중국을 통해서만 백두산을 갈 수 있는 것은 정전(停戰)체제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27일 정상회담 때 김정은 위원장에게 육로로 백두산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은 대통령만 바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판문점 선언’이후 사람들이 많은 반응을 보인 것이 경의선과 동해선 현대화 및 연결 문제였다. 경제 협력이나 비핵화 등은 전문가가 아닌 국민들이 생각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철도 여행은 보통의 한국 사람들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남한과 북한의 철도가 연결되면 서울이 국제역이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설레게 한다. 대구, 광주 혹은 부산을 가듯이 북경, 모스크바, 베를린 혹은 파리를 간다는 상상만으로도 이미 ‘국제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10년 전 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전에 필자의 어머니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유럽에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여행 계획은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이번에는 꼭 남북 철도가 연결되고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 필자의 어머니가 기차를 타고 유럽에 가기를 기대한다. 필자도 당연히 같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