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수정 대구가톨릭대 교수·교양교육원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라오콘의 이야기는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트로이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던 그리스는 마침내 ‘트로이 목마’라는 묘책을 꾸며내는데, 병사들이 숨어있는 목마를 마치 선물인양 트로이 성문 앞에 가져다 놓는다. 목마가 트로이 성 안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목마 안에 숨어있던 병사들이 나와서 성문을 열어줄 것이고, 그리스는 단숨에 트로이를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트로이의 사제였던 라오콘은 이런 계략을 알아차리고, 목마를 트로이로 들여오지 못하도록 한다.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의하면, 라오콘의 이러한 행동은 신들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켰고, 그 벌로 두 아들과 함께 뱀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서양 고대의 조각품 가운데 최고의 걸작을 꼽으라면, 아마도 라오콘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라오콘 군상’이 우선순위에 들지 않을까싶다. 이 작품은 높 이가 2미터에 달하는 대작으로서,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 그리고 이들을 칭칭 감아대며 공격하는 두 마리의 바다뱀이 뒤엉켜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극도의 혼란과 공포, 그리고 절망과 깊은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원래 헬레니즘 시기에 만들어진 청동조각을 로마시대에 대리석에 복제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로마제국의 집정관이자 문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박물지(Naturalis Historia)’를 집필한 플리니우스(Plinius)는 ‘라오콘 군상’을 일컬어 “그 어떤 회화나 조각보다도 뛰어난 작품”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로마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사라졌다가, 16세기 초 어느 이탈리아 농부의 포도밭에서 우연히 발굴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작품에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보내며 열광했고,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경이”라고까지 외쳤을 정도였다. 대체 ‘라오콘 군상’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이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를 그토록 감동시켰던 것일까? 고통스런 운명을 마주한 인간의 모습을 ‘라오콘 군상’처럼 처절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품은 매우 드물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뒤틀린 사지와 경직된 근육, 하늘을 우러르는 절망적인 눈빛, 그리고 반쯤 벌어진 입술을 통해,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고통과 고뇌를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형상화해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망 없는 탈출을 위한 라오콘의 몸부림을 보고 있자면, 문득 이것이 까마득하게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곁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라오콘은, 독일작가 빌헬름 하인제(Wilhelm Heinse)의 소설 ‘아르딩겔로(Ardinghello)’의 표현처럼, “고난에서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또 그 고난이 무언지도 모른 채 몸서리치는” 고통 받는 인간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느끼는 고통에는 뭔가 특이한 점이 있다. 욕구를 충족하지 못해서라기보다 도리어 과도하게 충족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들, 즉 ‘소비사회 증후군’이라 불릴만한 것들이다. 부유층은 과시소비로, 보통사람들은 모방소비로.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소비하고자하는 욕망은 통제 불능의 상태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조금이라도 소비가 위축되면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큰일 날 듯 보도하는 저녁뉴스를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공장을 풀가동해서 끊임없이 생산을 해내고, 수많은 제품들을 계속 소비해야하는 것이 인류의 과업일까? 현대인의 고통을 존재적 삶과 소유적 삶 사이의 간극으로 본다면, ‘라오콘 군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뚜렷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