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암모나이트는 고생대 데본기에서 중생대 백악기 사이에 생존했던 두족류(頭足類) 생물이다. 백악기가 1억4천400만년부터 6천600만년 사이이고, 데본기는 4억1천600만년부터 3억5천920만년까지의 기간이다. 암모나이트는 최장 3억5천만년 생존했던 기록을 가진 고생물이다. 오래 전에 멸종한 암모나이트 얘기를 꺼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법하다.

요즘 학생들은 나처럼 늙은 사람을 암모나이트라 부른다. 범접은커녕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나이 먹은 인간이라는 뜻의 호칭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나를 ‘틀딱충’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를 일이다. 뒷담화 자리에서 ‘틀딱충’이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이든 세대를 가리키는 용어 가운데 ‘틀딱충’은 매우 모욕적이다. 이런 은어는 한국사회가 중증(重症)의 세대갈등을 경험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각설하고, 나는 ‘원화’와 ‘환화’를 모두 본 세대의 사람이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을 단행한다. 환을 원으로 바꾸면서 화폐가치를 10대 1로 절하해 10환이 1원이 된 것이다. 경제혼란과 경제침체만을 야기한 화폐개혁은 실패로 끝난다. 그 결과 1960년대에는 환과 원이 상당기간 공존하게 된다. 하나의 화폐에 두 개의 표기가 병기된 이상야릇한 현상을 어린 시절 경험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나는 서울역에서 동대문까지 다녔던 전차(電車)를 타본 세대다. 1899년부터 시작하여 1968년까지 운행된 서울의 전차.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윤동주 시인의 산문 ‘시는 종이요, 종은 시다’는 글도 ‘서강벌’과 동대문 사이를 왕복하던 전차에서 발상한 것이다. 올해가 2018년이니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진 지 반백년 세월이 흘렀다. 호롱불 아래서 책을 보았고, 보리밥과 늙은 오이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시절도 있었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어린 날의 사건은 놀라운 것이다. 열 살 되던 해 1월 매서운 추위가 감돌던 점심나절. 길을 가던 나는 20대 청년이 열려진 대문으로 어느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본다. 그는 빨랫줄에 널린 붉은색 스웨터를 움켜잡더니 냅다 거리로 달려 나간다. 잠시 후 ‘도둑이야!’ 하는 고함소리가 나고, 청년은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붙들린다. 그의 눈에는 평온과 고요가 맴돌았다.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 어린 나이였지만 왜 그런 표정일까, 짐작해본다. 그는 뜻한 바를 성취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옥 가면 옷도 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술도 가르쳐주었으니 말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20대 장정(壯丁)이 축내는 식사량은 결코 작지 않을 터. 입 하나 덜 요량으로 백주대낮에 도둑질을 감행한 것이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공허한 눈길과 맥없는 걸음걸이로 일관한 청년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조카들은 먹음에 충실한지요?!”하는 인사말로 시작되던 외삼촌 안부편지는 그 시절의 먹고사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입증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이를 먹고 말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별똥별을 헤아리고, 반딧불을 잡아서 호박꽃 대궁에 넣어 플래시 삼아 뛰어놀던 시절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새삼 그때가 그리운 것은 아니지만 세태격변은 경악스러울 때도 있다.

10억 준다면 감옥살이 1년은 견디겠다는 대학생이 51%에 이른다는 세태가 그렇다. 돈이 인격과 교양을 대신하고, 돈이 무한 ‘갑질’을 가능하게 하고, 돈이 능력으로 환원되는 세상. 그런 세상 살면서 암모나이트 소리 들어도 지나온 시공간이 아쉽지 않다. 봄날의 불장난과 초여름의 아련한 아카시아의 향기와 단풍잎 찾아다니던 가을의 서정과 눈 내리는 밤길 홀로 걷던 청년시절이 외려 그리운 게다. 그래서일까, 내가 암모나이트라 불리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