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며칠 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가 지속되더니 찬바람 불고 비가 뿌린다. 벚꽃 이파리들이 바람에 나풀거리며 공중제비를 돈다. 몇몇 녀석은 차창에 온몸을 부딪치고 시나브로 자취를 감춘다. 미끄러지듯 포도(鋪道) 위로 산화(散華)하는 꽃잎을 보면서 봄날이 이울고 있음을 안다. 봄의 전령이 어디 벚꽃뿐이랴?! 산수유와 매화, 진달래와 개나리, 박태기와 살구, 명자나무도 봄날의 환희를 노래한다.

봄의 함의는 `보는` 것에 있는 듯하다. 단조롭고 칙칙한 겨울의 색이 화사하고 다채로운 색깔로 탈바꿈하는 계절이 봄이기 때문이다. 신록으로 몸단장하는 활엽수를 보노라면 그런 생각이 깊어진다. 연초록 새순이 진초록 침엽수와 빛나는 대비를 만들어낸다. 장년의 색깔과 유년과 소년의 색깔이 만나서 이뤄지는 대비만큼 현저(顯著)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봄이 올라치면 나는 은행나무 이파리를 들여다보곤 한다. 어린 녀석들의 작은 손바닥이 서너 갈래로 쪼개져 나오는 모습은 실로 경이롭다. 미래를 대비하는 현재의 꼴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이파리. 물론 그 안에는 다른 의미도 내포돼 있다. 그것은 엄동설한을 이겨낸 자의 빛나는 자부심이다. 울안에 한 뼘 남짓한 어린 은행나무가 자란다. 언젠가 던져진 열매에서 제풀에 싹이 터서 자라는 녀석이다. 거기 달린 단 하나의 눈.

모질게 추웠던 지난겨울을 찬란하게 견딘 키 작은 은행나무를 보면서 생의 환희와 약동을 느낌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과 더불어 화사함을 뽐내는 꽃잔디와 민들레, 제비꽃과 머위꽃의 합창은 밤을 낮처럼 환하게 한다. 우리는 화려하고 웅장하며 높게 빛나는 꽃을 예찬한다. 그러하되 발치에서 자라나고 피어나는 작고 여린 것들의 몸짓에는 태무심하다. 크고 우뚝하며 장쾌한 것들에 이끌리는 인심이야 인지상정일 것이다.

연극이 끝난 뒤 무대인사와 마주할 때 맨 처음 등장하는 이는 으레 단역이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배역을 맡은 이들로부터 시작해 조연을 거쳐 마침내 주연배우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쯤이면 극장 안에 우레 같은 박수와 환호가 쏟아져 나온다. 그럴 법하다. 공연을 인도한 주역에게 최대의 갈채를 보냄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만들어낸 격언은 이러하다. “단역 없이 조연 없고, 조연 없이 주역 없다!”

누구나 주연을 바란다. 최소한 조연이라도 꿈꾸며 사는 것이 인생사다. 하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그렇게 굴러가지는 않는다. 허다한 사연과 만남과 인연 속에서 우리는 숱한 단역과 희미한 조연에 만족해야 한다. 주역이 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은 평생 단 한 번 꿈같은 사랑을 경험한다. 그전에도 그 후에도 그에게 사랑과 인생의 주역은 부여되지 않았다.

아주 희소하고 스치듯 찾아오는 놀라운 환희의 순간이 이번 봄비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하되 우리를 들뜨게 했던 초목들의 향연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는다. 꽃이 꽃으로 멈춰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조화(造花)라 부른다. 그것이 생화인 한에서 꽃은 죽어야 한다. 말라 비틀어져 시들고 바람에 날려 대지로 돌아가야 꽃은 생장을 거듭할 기회를 가진다. `한 알의 밀알`에 대한 비유는 거기서 나왔다.

곳곳에서 우리는 봄날의 정령들과 아침저녁으로 만나고 있다. 작고 여린 것들에도 따뜻한 눈길을 던져보는 것도 봄을 완상(玩賞)하는 방법이리라. 사위(四圍)가 일리온의 축제의 밤처럼 환한 시절에 봄날의 뜻을 생각한다. 가까운 곳에서 경운기 지나가는 소리 외려 크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