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살며 생각하며 ⑼

책은 참 좋다. 원래 나무여서 그런지 냄새가 좋다. 사각진 모양도 좋다. 흰 종이 위에 까맣게 글자만 가득한 것도 좋다. 그림책도 물론 나쁘지 않다.

비좁은 방안에 책을 쌓아두는 것도 좋다. 책이 바깥 세상으로부터 방음막이 된다. 심리적 안정감도 준다. 지금 나는 책을 쓴 사람들의 세계 속에 들어 있다, 하는.

좋은 책이건만 책 만들기는 결코 쉽지 않다. 우선 원고가 좋아야 한다. 노는 책, 쉬는 책도 원고가 일단 문제, 소설책, 공부책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원고가 좋은 다음에야 어떻게 만들어도 제 향을 낼 수 있다.

다음, 교정이나 교열의 몫은 상상 이상이다. 편집자가 어떤 성정의 소유자인가? 어느 만큼 볼 수 있는가? 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좋은 작가가 제 자신에서 나지만은 않음을 열 가지 사례로 말할 수 있다. 소설은 특히 편집자 손에서야 귀한 옥이 된다. 그만큼 문장과 어휘를 세심하게 다루는 편집자 몫이 크다.

그 다음엔 오탈자다. 작은 것 같으면서 무섭게 큰 문제가 오자, 탈자다. 책 한 권에 오탈자 한두 개는 응당 있을 수 있는 법? 어림없다. 오자, 탈자 한줌씩 있는 책은 책이랄 것도 없다. 잘못 박히고 있어야 할 게 없는 것이 책에서만큼 끔찍하게 보이는 곳도 없다.

이제 또 디자이너, 그는 본문과 표지를 멋지고 아름답게 환골탈태 시켜주는 사람이다. 옷 만드는 디자이너는 화려하기라도 하지. 착각일까? 아무튼 책 디자인은 노동도 이런 상노동이 없다. 그러면서도 아이디어 좋아야 하고 세심함, 엄격함에 인내력까지 몽땅 갖춰야 한다. 하나 고치면서 두 개 흔드는 디자이너는 골치덩어리, 정신 사나운 사람은 책 디자이너로는 아예 낙제점이다.

어느덧 마지막 인쇄와 제본. 그냥 찍어내면 될 것 같아도 그런 법은 없다. `감리`라 해서 실제로 책이 어떤 빛깔로 어떻게 나오는지 살펴야 한다. 인쇄만큼 값이 들쭉날쭉한 것도 없고 사장님 성품이 그야말로 큰 몫을 차지한다. 책을 돈으로만 절대 안보는 분이어야 한다.

세번째 시집을 내겠다고, 아홉 번을 킨코스에 가 비싸게 주고 가제본을 묶었다. 한숨이 난다. 자꾸 보다 보니 닳고 단물이 빠졌다. 아무 맛도 안 난다. 그쯤 되어야 낼 만하게 된 것이라 위안 삼아 본다.

그러자 이번에는 평론집이다. 그게 언제였더라?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는 2007, `행인의 독법`은 2005년, 묵혀 놓은 평론들이 200자 원고지 3천매가 넘었다. 책이 되기는 되야겠다. 헌데, 매끈하고 잘생기기는 애시당초 글렀다.

좋은 글을 먼저 써야겠다. 좋은 공부를 해야겠다. 숨을 천천히, 깊이 쉬어야겠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