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곡 이규준-백성을 섬긴 마지막 유의`김일광 지음·내인생의책 펴냄, 소설·1만5천원

“내 삶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점이 세 가지 있었다. 가난했던 것, 집안이 변변치 못하여 스승을 얻지 못한 것, 조선말, 혼란기에 태어난 것이 내 삶을 끌고 왔다.”

조선말 실학자이자 한의학자였던 석곡 이규준(1855~1923) 선생의 애국 애민 정신을 소설로 풀어낸 것은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동화작가 김일광이 펴낸 역사소설`석곡 이규준-백성을 섬긴 마지막 유의`(내인생의책)는 석곡 이규준이 10세 때이던 1865년부터 1923년 조선의 마지막 유의로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과정을 문학적인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했다.

원고 1천매 분량으로 구성된 이 책은 조선말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에서 태어나 1923년 일제강점기에 세상을 떠났던, 그야말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살았던 이규준의 가난과 궁핍함에서도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학문의 경지를 열어나가 백성들의 생활 곳곳으로 다가가는 의술을 펼쳤던 유의(儒醫·유교 교리에 대한 정확하고 깊이 있는 지식을 통해 의술을 펼치는 의사)로서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작가는 석곡의 삶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우리말을 살려 쓰려고 노력했으며 뜻을 바르게 알리기 위해 몇 군데 한자를 함께 적기도 했다. 또한 석곡의 전문적인 유학 사상이나 한의학의 전문 지식은 되도록이면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석곡 이규준이 100년 전 역사적 혼란기를 어떤 생각과 모습으로 살아갔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방해할 것을 우려해 향토사학자 황인, 석곡도서관의 서형철과 함께 석곡의 자료를 찾아 연구하고 관련 학계 학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8년 여전부터 유학 관련 책과 여러 글을 탐독하는 것은 물론, 학회를 빠짐없이 찾아다닌 끝에 작품을 탄생시켰다.

또한 이규준의 제자였던 석재 서병오 기념관이 있는 대구를 비롯해 부산 등지를 방문해 이규준의 포항 뿐 아니라 영남지방의 대 실학자로서의 면모까지 치밀하게 묘사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규준이 가난 속에서도 독학으로 천문학·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기(氣) 철학과 양명학에서 깨달음을 얻어 허준, 이제마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한의학자로 근대 한의학의 서곡을 울렸지만 그동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이규준의 학문과 정신을 재조명한다.

이규준이야 말로 백성들의 생명과 정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삶을 살다간 숨은 영웅이라는 것. 아울러 선생의 염담허무(恬淡虛無·마음을 편히 하고 담담하게 하며 비우고 없애는 것) 정신이 오늘날 혼란한 시대와 고단한 우리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나침반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 석곡 이규준
▲ 석곡 이규준

소설은 선생이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 갯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낮에는 논밭으로 나갔으며 밤에는 골방에 찾아들어 스스로 학문의 경지를 열어나가는 한편 가난했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 나는 처지를 알고 어렵게 익힌 학문을 자신의 부귀를 위해 쓰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 곳곳으로 다가가 병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석곡의 모습을 그렸다. 곤궁함을 에너지로 삼아 삶의 완성을 끌어낸 석곡의 투철한 애민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던진다.

황원덕(동의대 한의과대) 교수는 서평에서“석곡 선생은 유교의 경전인 `십삼경`을 주소하고, 이를 요약하여 `석곡심서` `경수삼편`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선생께서는 삶을 통해 자연이라는 생명체가 나와 한가지니, 나를 사랑(仁)하고 용서(恕)하듯이 다른 이에게도 그리 하라는 사상을 보여주셨다. 특히 수기이경(修己以敬)을 강조하셨는데, 사랑과 용서에는 치우침이 없어야 하고(中), 상대를 대할 때는 과(過), 불급(不及) 없이 자연스러운 감정이 나타나야 만물과 내가 하나 될 수 있다(和)는 말이다. 이런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때(誠) 비로소 시비가 없어지고 국가와 사회가 온전히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고 적었다.

/윤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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