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 근속 김차진 명장
고졸 정비직 반평생 `한 우물`
대학 꿈도 못 꿀 정도였지만
직장 덕에 가난의 굴레 끊고
8명 뿐 `명장` 반열에도 올라
퇴직 후 후배 교육에도 열정

“1990년대 초반에 퇴직금 중간정산을 하면서 생긴 돈으로 부모님께 논 서 마지기를 사드렸습니다. 내내 소작농으로 살던 어머니가 환하게 웃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평생을 `포스코맨`으로 살아온 김차진<60·사진> 명장(名匠)의 얼굴이 추억에 젖었다.

1976년 3월 5일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포항제철 공무부 제선정비과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반세기 가까이 한길만을 달려온 김 명장은 포스코에서의 42년을 “축복”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어요. 경주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들어가면서부터 포스코 입사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공고생들이 그런 꿈을 꾸었지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김차진 명장은 누구보다 성실했다. 스스로는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중학교 성적도 꽤 좋았다. 하지만, 일찍 철든 소년은 빨리 사회로 나가 고생하며 살아온 부모를 경제적으로 돕고 싶었다.

그런 김 명장에게 포스코는 아버지에게서 자신과 아들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가난의 굴레`를 끊게 해줬다.

정비직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24시간 대기`가 일상이었기에 아들 입학식과 졸업식 한 번 참석할 수 없었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아들은 훌륭하게 잘 커줬다. 1984년 결혼과 함께 태어난 김차진 명장의 독자는 서울에서 박사 과정까지를 마치고 대전에서 공학관련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귀여운 손녀도 김 명장에게 안겨주었다.

포스코에서의 42년은 부모와 자식만이 아닌 김차진 명장에게도 행복하고 빛나는 시간이었다. 그는 포스코에 8명뿐인 `명장` 중 한 사람이다. 명장은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최고 기술자를 칭하는 영예로운 이름.

김차진 씨는 2016년 고로(철 용광로)의 최적화된 투자설계를 통해 투자비를 절감하는 등 고로 설비관리 프로세스를 개선한 공을 인정받아 제선고로 분야 명장에 올랐다.

“명장이 된다는 건 금전적 이익보다 명예를 얻었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는 김차진 명장의 말에선 긍지와 자부심이 읽혔다. 오래된 고로를 수리하며 땀과 눈물을 흘린 김 명장의 긴 세월을 회사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준 것으로서의 의미도 크다.

“지난 3월 31일 정년퇴직 기념패를 받았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지요. 하지만 아직 제 역할이 끝난 건 아닙니다. 앞으로 5년간 포스코 인재창조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자문교수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어요. 지금까지처럼 최선을 다해 직무에 임할 생각입니다.”

포스코에서 일한 42년 동안 휴가 한 번 마음 편히 다녀오기가 쉽지 않았다는 김 명장. 별다른 취미생활도 가져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사람은 한 우물을 파야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따른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통해 이렇게 노래했다.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영민하고 효심 깊었던 열아홉 살 청년은 `사람들이 덜 밟은` 자신만의 길을 걸어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회갑의 할아버지가 됐다. 빙그레 웃는 표정에서 따스함이 느껴지는 김차진 명장은 말한다.

“축적된 기술을 효과적이고 합리적으로 교육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후배들과 함께 고민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얻어질 `기술의 공유`가 포스코의 미래를 보다 밝게 만들어주지 않을까요.”

여전히 `청년의 심장`을 가진 김 명장이니 그가 지나온 42년 과거의 시간보다 앞으로 만들어갈 미래가 더 기대되는 건 비단 기자 하나만이 아닐 듯하다.

/홍성식기자

    홍성식기자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