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다음 달 3일은 제주 4·3사건 70돌 되는 날이다. 19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4·3사건의 불씨는 1947년 3월 1일로 소급된다. 그날 3·1절 기념대회 참가자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남로당은 경찰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제주도 직장의 95%에 이르는 민관 총파업이 일어난다. 미군정은 경찰에 반대하는 남로당을 격파하기 위해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 단원들을 대거 제주도로 급파한다.

불과 1개월 만에 검속으로 500여 명이 체포되고, 1년 사이에 파업 주모자 2천500여 명이 구금되기에 이른다. 체포와 구금 과정에서 서북청년단은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제주도민들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폭발직전의 위기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러다가 4월 3일 제주도 중산간 오름 지역에서 봉홧불이 불타오르고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2000년 제정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제주 4·3사건의 시기를 경찰의 발포가 있었던 1947년 3월 1일부터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해제되는 1954년 9월 21일까지 6년 6개월로 잡고 있다. 우리가 제주 4·3사건을 말할 때 그것은 이 시기에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제주 전체도민의 11%에 이르는 2만5천~3만의 제주주민이 학살당한 사건을 일컫는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은 4·3사건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규정해 금기시했으며, `문민정부`를 주장한 김영삼 정권 역시 다르지 않은 궤적(軌跡)을 걷는다. 그러다가 1998년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제주 4·3사건 특별법 제정과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을 통해 4·3사건의 진상규명과 정부의 공식사과, 희생자 보상 등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제주 4·3사건의 개략적인 내용이다.

해방공간의 극렬한 좌우대립 이후 남북한에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되고, 곧 이어 6·25 한국동란이 발생한다. 전쟁을 전후로 한 시점에 이승만은 제주 4·3사건 이외에도 국민방위군 사건이나 보도연맹 사건 등을 일으켜 근면하게 자국민을 살육(殺戮)했다. 현대사회에서 국가가 가지는 가공(可恐)할 공권력을 동원하여 수십만 자국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자를 혹자(或者)는 여전히 국부(國父)로 숭상하고 있다. 참혹하고 또 참혹한 4·3의 살육현장을 확인하면서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리는 것이었다. 아아, 나의 조국이여, 제주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국을 위해 불가리아로 쳐들어가 무고한 민간인을 처참하게 학살한 조르바는 오그레에게 말한다. “조국이 어디든 우리 모두는 한 형제예요. 조국이 있는 한 인간은 짐승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조국의 이름으로 전쟁에 가담해 적국의 시민을 학살한 조르바의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었으나 통렬하기 그지없다. 모든 인간은 조국보다 우선한다. 조국을 내세우며 민간인 학살을 강제하는 정부와 권력자는 죄악이다.

올해는 정부수립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두 세대 남짓한 세월,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국가의 이름으로 살해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되 21세기 광명천지에서 국가와 정부, 권력자를 위한 민간인 학살은 반드시 종식(終熄)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그마한 시대정신 하나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