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일본 ⑥

▲ 푸른 호수와 새하얀 눈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홋카이도.

홋카이도 여행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순백의 눈에 뒤덮인 아름다운 자연과의 만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넓은 호수 너머로 펼쳐진 설산(雪山)과 어두운 하늘에서 보석처럼 뿌려지는 눈발. 쌓인 눈 위를 다정하게 손잡고 걸어가는 젊은 연인들…. 새하얀 눈이 주는 정감은 홋카이도의 시골마을과 현대화된 도시 삿포로가 다르지 않았다.

홋카이도를 여행했을 때 동행한 엄마가 잠들면 홀로 나와 눈 쌓인 거리를 걷는 일이 잦았다. 늦은 밤. 이국의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누구라도 자연스레 생각이 많아지게 된다. 지나온 시간 또한 동시에 아련해진다.

그 색채와 질감으로 인해 `눈`은 첫사랑의 은유나 상징으로 곧잘 사용됐다. 특히 시와 소설 등의 문학에서 그랬다. 기자를 포함한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첫사랑의 환희와 아픔.

어지간한 초등학생의 키보다 높이 쌓인 삿포로의 눈을 보며 열여덟 문학청년 시절과 첫사랑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외로운 여행자가 겪어야 할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었다.

▲ 홋카이도 시골마을의 일상적인 겨울 풍경.
▲ 홋카이도 시골마을의 일상적인 겨울 풍경.

▲ 문학청년 시절의 꿈과 사랑을 돌아보다

`첫사랑`.

이 단어만큼 사람의 가슴을 크게 흔드는 게 있을까? 인간의 사랑 안에는 동물의 종족보존 본능과는 구별되는 희생과 배려가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한다는 것`이 인간과 여타의 동물을 구분하는 하나의 요소로 적용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이 `처음`이라는 순수성과 순정함을 가질 경우 첫사랑이라 이름 붙여 그 아름다움에 날개를 달아줬다.

`처음`이라는 말은 얼마나 큰 기대감과 희망을 가지게 하는 단어인가. 그런 이유에선지 첫사랑은 문학의 소재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용돼왔고 요즘도 마찬가지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그리하여 꿈과 희망이 배반 당하는 좌절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누구나 예술가를 꿈꾸던 청년시절. 우리가 읽었던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의 `첫사랑`은 그 시절 고통스런 세상을 견디게 해준 삶의 방부제였다.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를 보며 아름다운 소녀가 은둔한 고성(古城)으로 잠시의 주저도 없이 달려가 맑고 투명한 뺨을 가진 그녀와 포옹하는 꿈을 꾸지 않은 남학생이 있을까.

또한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서처럼 멋들어진 귀족 브론스키 백작과의 비극적인 로맨스를 동경하지 않은 여고생도 드물 것이다.

유부녀인 로테를 사랑한 베르테르의 눈물과 죽음을 보며 로테의 남편 알베르트가 미워졌던 건 비단 기자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는 그런 때였다.

삿포로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송이는 바로 이런 문학청년 시절을 돌아보게 했다. 아득하고 서럽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한없이 그리운 그 시간들.

▲ 겨울철 삿포로의 시내 풍경.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가 줄지어 서있다.
▲ 겨울철 삿포로의 시내 풍경.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가 줄지어 서있다.

▲ 세상 모든 `첫사랑`이 아름다운 이유

눈으로 뒤덮인 도야 호수 주변을 산책하면서는 “어찌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그 위대성을 찬양하는 작품이 외국에만 있을까”라는 혼잣말을 했다.

한국의 시인과 소설가들에게도 첫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문학의 소재였고 화두였다. 본시 문학의 본령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다름없다. 그런 이유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학에는 형태를 달리 하는 사랑이 담겨있다. 그러니 사랑이 주제, 혹은 소재로 사용된 작품 모두를 얘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소설가 정도상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각기 다른 사회적 갈등에 직면한 인간의 상황을 밀도감 있게 묘사했다. 그의 소설 중 독특하게 연애소설로 분류되는 것이 `열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다.

술과 환각제에 취해 인생을 낭비하던 고등학생 준석이 순정한 영혼을 가진 여자친구 채옥을 통해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란 말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낸 작품.

불량학생 준석이 첫사랑을 시작하며 삶과 사회에 눈 떠가는 과정은 당시 10대 후반이던 기자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철학적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다. 그 작품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준석과 채옥의 입맞춤에선 얼마나 가슴이 떨렸던지.

한국 문단 안팎에서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평가받는 성석제의 `첫사랑` 역시 잊을 수 없는 소설이다. 거대 도시의 변두리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두 남자 중학생의 이야기를 통해 누구나 겪게 되는 사춘기의 통과의례와 생의 비의(悲意)를 담아낸 이 작품은 연애소설인 동시에 빼어난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어서 빨리 어른이 돼 절망과 눈물이 반복되는 고향을 떠나 큰 도시로 가고 싶은 소년들. 아픔만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그들을 해방시킨 건 바로 사랑이었고, 둘의 화해와 포옹은 두 소년 모두를 그들이 상정한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게 해준다.

예술적 관점에서 볼 때 이야기 속 그들이 성공한 어른으로 자랐건 절망한 폐인으로 살게 됐건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둘이 겪은 `첫사랑의 기억`만으로도 소년들은 아주 오래 순정한 아이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테니까.

▲ 눈 쌓인 홋카이도의 낭만적인 풍경은 첫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 눈 쌓인 홋카이도의 낭만적인 풍경은 첫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 설경(雪景) 속에서 한 줄의 문장을 읊조리다

소설 속을 헤매다 현실로 돌아오니 기자는 눈 내리는 홋카이도의 풍경 속에 홀로 서있었다. 지나온 날도, 살아내야 할 오늘도, 견딜 수밖에 도리 없는 내일까지가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 허허로움 탓이었을까? 아래와 같은 정도상의 소설 속 문장이 눈앞을 스쳐갔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안에서 안타깝게 놓쳐버린 첫사랑이 그립다. 첫사랑의 기억을 돌려준 삿포로의 설경 또한 그립다.

“첫사랑은 자칫 시시하고 유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시하고 유치한 첫사랑을 통해 시시하고 유치한 세상에 눈뜨게 되고, 시시하고 유치한 세상에 눈뜨고 나면 이 세상에 시시하고 유치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진실에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훗카이도의 진주`로 불리는 삿포로는…

시내를 운행하는 조그맣고 예쁜 전철, 거리를 활기차게 만드는 세련된 옷차림의 젊은이들, 일본과 러시아 사이 차가운 바다 오호츠크에서 잡아 올린 커다란 대게, 쏟아지는 눈 아래서 뛰노는 아이들…. 삿포로는 매력적인 동양의 여행지임이 분명하다. 이시카리 평야와 도요히라 강 일대에 만들어진 이 도시는 여름이 한창인 8월에도 평균기온이 영상 21도 정도로 매우 쾌적하다.

겨울은 산악지대에 3m 이상의 눈이 쌓여 낭만을 제공한다. 물론, 스키와 스노보드 등의 레포츠를 즐기는 이들도 흔하다.

삿포로가 본격적인 도시 건설을 시작한 시기는 18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계획도시였고, 시가지는 바둑판처럼 구획별로 잘 정돈됐다. 1886년 도청이 설치되면서 삿포로는 홋카이도의 행정 중심지가 된다.

일본 특유의 조용함과 친절이 곳곳에서 확인되는 삿포로는 돼지고기와 닭 뼈, 각종 해산물과 채소로 맛을 낸 국물이 일품인 일본식 라면으로도 유명하다. 시내에는 문을 연지 50~60년이 넘는 오래된 라면가게들이 적지 않다.

1972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이기도 한 삿포로는 일찍 지하철을 완공했고, 세이칸터널의 개통과 치토세공항의 개항으로 교통의 요충지가 됐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다수지만, 도심에서 벗어난 주변 지역은 농업과 축산업도 발달했다. 청정지역에서 생산되는 맥주와 우유가 맛있고, 식품가공업과 인쇄·출판업 등도 삿포로의 경제를 탄탄하게 만들어준 효자산업들이다.

홋카이도의 최대 도시인 삿포로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으로 인해 일본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지역으로도 손꼽힌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여름은 서늘하고 겨울에는 최고의 설경이 여행자를 기다린다. 해마다 수많은 나라의 관광객이 몰리는 `눈 축제`도 빼놓을 수 없는 삿포로의 자랑이다. 많은 이들이 “모이와산 로프웨이 케이블카를 타고 삿포로 밤 풍경을 내려다보는 건 놀랍고 행복한 경험”이라고 말한다.

삿포로를 찾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인근 도시 오타루와 홋카이도대학,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대회가 열린 삿포로돔과 울창한 원시림이 반겨주는 조잔케이 온천을 찾아 일상의 고민과 힘겨움을 잠시 내려두고 휴양과 자유를 만끽한다.

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구창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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