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살며 생각하며 ⑹

조르조 아감벤의 책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여운이 짙고 길게 남는 책이다. 프리모 레비라는 이탈리아 유태계 작가가 있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그 나날들의 이야기를 썼다.

아감벤은 레비의 문학을 다루면서 `증언`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말한다. 증언은 증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아우슈비츠에서 그 인류의 참상을 완전히 경험한 이들은 그곳에서 죽었고, 따라서 증언할 수 없다. 완전한 증언은 말로 구성되지 못한 채 그들의 죽음과 더불어 세상의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살아남은 자들이 증언한다 해도 그것은 잃어버린 완전함을 대신하는, 일종의 대체재일 뿐이다.

이렇게 깊은 자의식이 레비로 하여금 아우슈비츠에 관한 심오한 증언의 문학을 가능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레비론이 아니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윤리학의 자명한 가설처럼 통용되던 것들도 여기 이르러서는 시효를 상실한다. 왜냐. 이곳은 삶과 죽음이 맞붙은 곳, 죽음이 살아 있고 삶이 죽는 곳이기 때문이다.

현대 이전에 권력은 통치되는 자들을 죽이거나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현대 권력의 생명정치는 원리가 바뀌어 사람들을 살리거나 죽게 버려 둔다. 이제 아우슈비츠는 또다른 지대다. 여기서 권력은 삶을 죽음으로 만들고 죽음을 살게 한다. `무젤만`(아우슈비츠에서 영양실조와 고문, 노역 등으로 마치 시체처럼 돌아다니는 죄수들)이 바로 그 징표다.

이 책에 인용된 나치 장교가 죄수들을 향해 말한다. 여기 있었던 일들은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모두 인멸될 테니까. 설혹 너희들이 살아남아 증언한다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없었던 일처럼 취급될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처절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위안부`들이 할머니가 되어 겪은 일들을 말하자, 일본은 그런 일이 없다 하기 바쁘고 한국의 어떤 여성학자는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가설`을 `실재화` 하고, 고소받은 그에게 벌금이 선고되자 국내외의 저명한 `멍충이`들까지 나서 서명을 한다. 한국에서 학문의 자유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그 훌륭한 자유가 현대 이래 위기 아닌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듯이.

그렇게 위안부의 `증언`은 `묻혀간다.` 정부는 기이한 비밀협상으로 흙더미를 끼얹기까지 했다.

여기에, 세월호 참사. 진실은 시간의 흐름 속에 묻힐 위기에 처했다. 완전히 증언해야 할 이들은 바다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고, 남은 자들의 목소리는 진지하게 청취되지 못했다. 의심치 않건대, 여기는 또다른 현대판 생명정치의 현장이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