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요즘처럼 추위가 맹위를 떨친 일이 있었나 돌아본다. 어렸을 적 난방이 온전치 않아 윗목에 놓아둔 아버지 자리끼가 아침에 꽁꽁 얼었던 기억이 난다. 해마다 2월 초에 있던 졸업식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추위를 이겨낸 일도 생각난다. 전시(戰時)도 아닌데 군사정권은 졸업식과 입학식을 운동장에서 하도록 강요했다. 날이 아무리 추워도 어린것들의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장외행사를 강제했던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칼끝이 떠오른다.

작년에 기상청은 “올겨울은 대체로 포근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행태인가?! 슈퍼컴퓨터가 없어서 오보(誤報)가 잦다고 변명해댄 것은 귀엽기라도 했는데, 요즘엔 아예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주구장창 `북극한파타령`이다. 아린 바람이 살갗을 할퀴는 한파(寒波)에도 폐지와 공병을 주우러 다니는 노인들의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다음 주 오늘이 설날인데, 그이들은 뜨끈한 떡국이라도 한 그릇 드실 수 있으려나?!

서민들의 가슴을 잘 벼려진 칼날로 썰어내는 판결이 나왔다. 36억 넘는 뇌물을 청와대에 상납했는데 집행유예로 범죄자를 석방한 것이다. 5천900만원 뇌물에 징역 1년 실형(實刑)을 살고 있는 사람한테는 뭐라고 하려는가?! 60배도 넘게 돈을 찔러주었는데 집행유예 판결이 나왔다. 어느 일간지 만평(漫評)이 비수처럼 흉중을 찔러온다. 찬바람 속을 걸어가는 시민들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리로 맵짠 설한풍이 칼날처럼 불어온다.

하기야 `전가통신(錢可通神)`이라는 고사성어가 있기는 하다. 당나라 사람으로 하남 부윤을 지내던 장연상이란 자가 있었다. 고관대작들과 연루(連累)된 사건을 처리하던 와중에 그는 10만 냥의 거금을 받고 사건을 유야무야 처리한다. 훗날 어떤 부하가 그 사건처리의 내막을 궁금해 하자 장연상은 “그렇게 많은 돈이면 귀신과도 통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고 한다. 요즘처럼 돈이 인간의 전부인 시대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88 올림픽` 직후인 1988년 10월 8일 발생한 `지강헌 사건`을 기억한다. 영등포 교도소에서 공주 교도소로 이감되던 지강헌과 미결수 11명이 집단으로 탈주한 다음 9일 동안 인질극을 벌인 사건이다. 그때 지강헌이 만들어낸 사자성어가 지금도 백주대로를 활보(闊步)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돈 없으면 죄가 있고, 돈 있으면 죄가 없다는 말이다. 지강헌은 말한다.

“돈 없고 권력 없이 못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 된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우리 법이 이렇다.“ (출처: 법원 이야기,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강헌 이야기), 오호택 지음, 살림, 2011.> 한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는 설 명절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희대의 판결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문전성시라 한다. 21세기 광속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눅눅한 잔영과 대면한다. 나라 전체가 적폐청산과 혁신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판국에 법원은 마냥 뒷걸음질이다. 최소한의 법리적 검토와 양심적 판단이 법관의 기본적인 자질 아닌가. 마녀사냥식의 인민재판이라는 방패막이로 사안을 호도하기엔 너무 멀리 나갔다.

내 어린 시절 설날이 오면 어른들께 세배하고 세뱃돈 받아 주머니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그걸로 무엇을 할까, 하고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던 코 흘리던 시절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관계가 세워지고 허물어지면서 나이를 먹는다. 육십갑자 한 바퀴가 꽉 차게 돌도록 세상 살면서 이런저런 지은 죄를 돌아보면 새삼 먹먹하다. 나로 인해 상처 받았을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까, 가슴 시리게 생각한다.

2018년 무술년 원단을 맞으며 한국사회의 본원적인 변화의 계기가 만들어지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지금 일대 전환기의 초입에 서있다. 곧 우수(雨水)가 다가오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