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의수<br /><br />전 포스텍 교수
▲ 서의수 전 포스텍 교수

필자는 지난 칼럼에 새해에 개인들이 각자 자주성(autonomy)을 넓히기로 결심하면 좋겠다고 썼다.

이는 자신을 위한 새해 다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늘은 개인의 자주성을 보완하는 하나를 추가하려 한다. 새해 다짐으로 내가 속해 있는 사회와 조직을 항상 염두에 두는 `시민 정신`을 새해에 기르면 좋겠다. 시민정신에 대해 필자가 지난 칼럼들에 언급한 문구들을 여기에 엮어 본다.

우리 경제가 선진국 수준으로 도약하는 동안 시민의식, 주인의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몸은 커졌으나 사고방식과 행동은 어린이 같은 격이다. 시민의식은 먼저 시민이자 주인으로서 권리와 자유를 행사하는 주체성을 갖춰야 하며, 동시에 스스로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지는 윤리적 태도와 행동을 기반으로 세워진다. 이는 `개인없는 개인 이기주의`와 정반대이다.

내가 미국에서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한자(漢字)를 하나 가르쳐 줄텐데, 의미가 심오하면서도 간단하기 때문에 절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 다음, 한자로 사람(man)을 어떻게 쓸 것 같으냐고 내가 물으면 학생들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칠판에 사람 인(人)을 크게 써 보이고 `왜 사람을 이렇게 표기하는가?`라고 물으면, 한자를 전혀 모르면서도 미국학생들은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며 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저서 `내가 보는 세상(The World As I See It)`의 첫 대목에 그는 현재 생존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과거에 생존했던 수 많은 사람들 덕분에 산다고 기술하고, 자신이 받은 대로 남에게 주어야 함을 `매일 백 번씩`자신에게 상기시키고 감사한다고 썼다.

내 주변을 둘러보라. 내가 만든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내가 입고 있는 옷, 살고 있는 집, 먹는 음식, 시속 100㎞로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 강을 쉽게 건너게 해 주는 다리, 산을 가로지르는 터널, 교육, 행정, 국방, 법, 치안 등 다른 이들 덕분에 우리는 일상 생활에 필요한 수 많은 것들을 즐기며 산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홀로 산다면 얼마나 고생일까? 씨 뿌리고, 재배하고, 수확해야 곡식을 얻는다. 곡식도 요리해야 먹을 수 있다.

옷은 어떻게 만들지? 집도 내 손으로 세워야 하는데 갖가지 재료를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건축하지? 자동차 비행기도 내가 만들어야 여기 저기도 다닐 수 있는데, 언제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설계하고 고안해 만들지?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미국이 튼튼하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뤘던 1960년대 로버트 케네디는 `국민생산`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미국이 물질적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 같으나 오히려 `행복과 만족의 가난`에 빠지는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는 `국민생산`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생산적이고 행복과 만족을 고조하는 활동도 열거한다. 어린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적 수준, 행복한 결혼 생활, 공개적 토론의 지적 가치, 용기와 지혜, 서로에 대한 정, 나라에 대한 긍지와 사랑, 정부관리들과 지도자들의 충실성 등 `국민생산`통계에 포함되지 않지만 인생을 가치있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그는 지적했다.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말을 묵상해본다. “잘 먹고 잘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좋은 일을 해야지…. 사람은 의식주를 얼마나 잘 갖추고 누리며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미치면서 사느냐가 중요하다.”

최근 어느 신문에 한국에서 한국인과 결혼하고 사는 덴마크인이 “덴마크인이 행복한 이유요? 서로 돌보며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는데, 그의 한 대목은 이렇게 말한다.

“나 자신의 귀함을 알고 다른 사람 또한 귀하게 여기며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며 내 이웃을 돌아보고 함께 살아간다면 어느 순간 행복이 찾아와 있을 것입니다.”

새해에 나의 자주성을 적극적으로 발휘하여 나 자신은 물론 우리 사회를 보다 밝고 행복하게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