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다시 해가 바뀌었다. 불과 몇 시간을 경계로 지난해와 새해가 갈린다. 시간과 달력의 유희다. 아쉬움과 기대감 사이에서 우리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을 생각한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인과율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생로병사의 필연적인 수순에 갇힌 바둑돌처럼 허우적거리다 종점에 다다르는 것이 인생이다. 모든 생명체가 `지금과 여기에` 함몰(陷沒)되어 살아가지만, 인간만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 미래에 기대를 건다.

미래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채 살아간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과거는 물론이려니와 현재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필연적인 숙명인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하는 말을 주술(呪術)처럼 되뇌면서 각오를 피력한다. 거기에는 금연, 영어공부, 다이어트, 취직 같은 희망사항이 담겨있다. 국가적으로 요약하면 한국에서는 영어, 미국에서는 다이어트 열풍이 해마다 불어온다. 결과는 예외 없이 언제나 실패!

그래도 한국인들은 해마다 1월 1일이 되면 바다와 산과 고지대(高地帶)를 찾는다. 꼭두새벽부터 명당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분투가 뜨겁다. 그들은 환하게 떠오르는 신년벽두의 첫 번째 태양을 바라보며 내밀하게 소원을 탄원(歎願)한다. 그들이 우러르는 태양은 어제도 떠올랐고, 내일도 뜰 것이지만 1월 초하루 태양은 뭔가 다른가 보다. 오래전 중3때 외갓집에서 맞은 새해 첫날의 태양을 향해 소원을 빈 적이 있다. “좋은 학교 보내주세요?!”

`뺑뺑이`로 경기에 들어갔지만, 대학입시에서 고배를 마시고 재수라는 형극(荊棘)의 길을 걸었다. 3년 전 환했던 아버지 얼굴은 잿빛으로 어두웠고, 나는 죄인처럼 슬프고 우울했다. 그 이후로 태양을 바라보며 소원을 빈 것은 서른 살 신혼여행 때였다. 아내는 가정의 행복과 나의 건강을 빌었고, 나는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했다. 강릉 앞바다에 찬연하게 떠오른 태양은 네 가지 소원 가운데 어느 하나도 온전하게 들어주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태양을 향해 소원을 비는 소박함을 버렸다. 간절한 소원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춘 탓이기도 하지만, 태양과 나의 소원은 전혀 무관했던 때문이다. 그저 느긋하게 정월 초하루를 맞이하고 마음 놓고 늦잠을 청한다. 지난날을 반추하되, 다가올 날에 대한 섣부른 기대는 접는다. 기대와 설렘과 희망과 꿈은 모두 청춘의 몫이다. 나이든 축들이 그런 것들을 소원하는 행위는 속되고 비천하다. 청춘의 밑거름이나 되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러하되 2018년 무술년, 내게는 몇 가지 바람이 있다. 거시적(巨視的)으로 보면 남북관계 정상화, 경제민주화와 청년실업 해소, 그리고 개헌이다. 수구정권이 비열하게 악용해 최악의 사태로 치달린 남북관계 복원은 전쟁방지와 평화구축과 직결된다.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육신과 영혼을 치료하는 경제민주화, 3포 세대를 구원할 청년실업 해소도 중차대한 문제다. 여기 덧붙여 87체제의 종식(終熄)과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는 개헌 또한 종요롭다.

숱한 화제를 뿌리며 언론을 장식하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구시대의 유물인 적폐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적폐의 온상이자 적폐를 양산한 장본인들이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우리의 발목을 끈끈하게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은 필지(必至)의 사실이다. 촛불민심이 권력자와 정당에게 부여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현명하게 활용해야 한다. 그것이 나라와 민족의 유일무이한 생명선이다.

지난 1월 1일 일출은 대단히 청명하고 화사했다. 그날 저녁에는 아주 크고 맑은 보름달이 환하게 떠올랐다. 자연에게 소망을 빌지는 않지만, 그런 전조(前兆)에서 무술년의 웅비(雄飛)를 독서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남북이 적대적 공존관계를 벗어나고, 돈 때문에 죽어가는 이웃이 줄어들며, 미래세대를 위한 따뜻한 개헌이 2018년에 꼭 이뤄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