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에 읽을 만한 시집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해를 맞이하는 시기가 돌아왔다. 들뜨고 분주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스스로를 성찰하며 2018년의 꿈과 희망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책을 읽는 것으로 2017년을 정리하고, 밝아올 새해를 맞이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연말연시에 읽을 만한 2권의 시집을 추천한다.

1980년대에 20~30대 청춘을 살아낸 한국 시인들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시대가 그랬다. 독재와 전횡을 거듭하던 부도덕한 정권은 결 고운 마음씨를 가진 젊은 시인이 등장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이은봉(64) 시인도 그 시대와 무관할 수 없었다. 날을 세운 풍자와 거친 시어가 그의 작품 속에서 꿈틀거렸다. 1986년 출간된 첫 시집 `좋은 세상`이 그랬다.

붉은 피와 푸른 청춘이 시집 속에서 갈등했고, 불의와의 반목 끝에선 불꽃이 튀었다. 시집의 제목은 “좋은 세상은 아직 멀었다”는 역설이었다. 그때 이 시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이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무엇이 너를 키우니` `걸레옷을 입은 구름` 등 여러 권의 시집이 이은봉의 머리를 거쳐 손끝에서 탄생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대학교수가 돼 학생들을 가르쳤고, `실사구시의 시학` `시와 생태적 상상력` `화두 또는 호기심` 등을 통해 문학평론도 병행했다.

오늘 소개하는 `봄바람, 은여우`는 갑년을 넘긴 이은봉 시인이 부르는 `이순(耳順)의 노래`다. 아래 시에선 한소식 한 승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 이은봉 시인
▲ 이은봉 시인

봄바람은 둑길가의 민들레 씨앗털이다/등 떠밀지 않아도 절로 날개를 파닥거린다//민들레 씨앗털은 지금 촉촉이 젖고 있다/초록강아지들 흥건히 껴안고 있다

- 위의 책 중 `봄바람` 일부.

봄에 부는 바람을 `파닥이는 날개`로, `초록강아지`로 표현한 감각을 보자면, 이은봉은 아직 젊다. 그럼에도 사물의 본질과 세계의 운행법칙을 읽어낸 60대의 여유와 세련됨이 보인다.

이은봉은 문단에서 `잘 웃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어지간해선 얼굴 찡그리고 화내는 법이 없다. 시종여일 빙그레 웃는 낯이다. 그 웃음 속엔 서늘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담겼다. 깊숙한 생의 내부를 꿰뚫어보는 견자(見者)의 미소. 아래 시 `각시탈`은 그의 웃음에 관한 것이다.

티내지 않으려고 씨익, 웃다 보니/웃는 모습, 어느새/일상이 되어버렸다//평범해지려고 씨익, 웃다 보니/웃는 표정, 벌써/익숙해져버렸다...

`티내지 않으려`, 혹은 `평범해지려` 웃었다는 이은봉의 시적 고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는 시를 쓰는 자의 고통과 눈물을 숨긴 채, 평범을 거부하고 비범함을 지향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봄바람, 은여우`에 실린 노래 중 가장 매혹적인 건 `정취암 언덕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구름바다`라는 시다. 이 시의 마지막 두 연은 이은봉이 웃음 뒤에 숨긴 서늘하면서 뜨거운 시심을 구구한 설명 없이도 알게 해준다. 외로운 12월 겨울밤의 추위까지 따스하게 녹여준다.

가까운 것은 늘 먼 것을 꿈꾼다/생사의 나뭇가지는 지금 희망의 산으로 가고 싶다//생사의 바깥에서 저 스스로 꿈이 되는 산/이제는 잿빛 옷의 구름바다를 데리고 가고 싶다.

 

모딜리아니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매료된 시인 한 명을 알고 있다. 해사한 얼굴에 말수가 적은 사내. 오래 전 `편지 쓰는 작가들의 모임`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기자는 먼 세월을 소급해 두 명의 시인을 떠올렸다.

고교 시절, 또래 숙명여고보 여학생들의 마음을 흔들던 미소년에서 카프(KAPF) 소장파의 좌장으로 존재를 전이한 임화. 그는 시적 재능을 이념에 빼앗기고 타향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사람이다.

그리고, 박인환. 낭만과 우울 사이를 무시로 오가며 서른한 살에 요절한 그는 제스처로서의 시가 아닌 온몸으로 밀어가는 시학(詩學)을 위해 청춘을 소신공양했고, 그것이 이른 죽음을 불렀다.

외모는 물론, 풍기는 작가적 향취까지 임화와 박인환을 닮은 시인이 바로 허연(51)이다.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를 통해 빛이 아닌 그림자, 열락이 아닌 침잠, 희망의 배후에 자리한 어두움을 노래해온 그의 또 다른 시집 `오십 미터`는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노래들로 가득하다.

시를 쓰기 시작한 20대 중반부터 허연이 주목한 것은 즐거움의 파편이 아닌 인간의 삶 내·외부에 자리한 외로움과 고뇌였다. 지천명을 넘긴 그는 이제 태생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 어두움을 죽음이란 단어를 향해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 이은봉 시인
▲ 이은봉 시인

죽은 이의 이름을 휴대폰 주소록에서 읽는다. 나는 그를 알 수가 없다. 죽음은 아무에게도 없는 어떤 것이니까. 신전의 묘비를 읽도록 허락된 자는 아무도 없으므로.

- 위의 책 중 `Nile 407` 일부.

현대를 숨쉬는 `산 자`들의 영역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휴대폰에서 그 옛날부터 거부할 수 없는 주문처럼 지속돼 온 `죽음`의 그림자를 읽어내는 그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을까?

살아간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시인이 되기 힘들다. 인간과 세계를 향해 뻗은 촉수에 슬픔이 묻어나오지 않는 이들을 시인이라 칭했던 역사는 드물었다. 어떠한 노력으로도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미지의 그리움이 시인을 존재케 했다. 허연은 그걸 아는 사람이다. 허니, 시인인 그가 차안(此岸)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 일.

한국의 `좋은 시인` 대부분은 현세에서의 욕망을 눈 아래 둘 수밖에 없다. 허연 역시 그렇다. 그렇다면 그는 지리멸렬한 차안에서 `빛나는 피안(彼岸)`을 향한 시의 촉수를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아래 인용하는 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읽힌다.

사람들은/옆집으로 이사 가듯 죽었다/해가 길어졌고/깨어진 기왓장 틈새로/마지막 햇살이 잔인하게 빛났다/구원을 위해 몰려왔던 자들은/짐을 벗지 못한 채/다시 산을 내려간다.

- 위의 책 중 `사십구재` 일부.

보통의 사람들에겐 `존재의 절멸`에 다름 아닌 죽음. 그러나, 시인은 그 죽음조차도 삶의 일부로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마주한 죽음은 슬픔이나 통곡이 아닌 말갛고 투명한 시적 재료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자성의 시간을 원하는 이들에게 허연의 `오십 미터`가 던지는 메시지는 무겁고도 진지하다. 또한 의미가 작지 않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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