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홋카이도에 다녀왔다. 십 수 년 전 유럽에 갈 때 도쿄를 경유하느라 나리타공항 호텔에서 하룻밤 잔 것 말고 제대로 된 첫 여행이었다. 너무 가까워 호기심이 안 생겼을까. 오랫동안 일본은 여행지로서 관심 밖이었다. 어쩔 수 없는 반일감정과 `예의가 지나쳐 오히려 인간미가 없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볼 것도 먹을 것도 별로 없는, 그저 가까운 맛에 가는 여행지라고 무시하면서도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등을 전율하며 읽었다. 그러면서 내심 궁금해졌을까. 온천과 숙박이 결합된 전통 여관 료칸을 즐기며, 지루한 일상에 지친 눈을 설경에다 씻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환상적이었다. 일본의 친절과 예의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스노비즘적 태도이든 저자세이든 간에 여행자로서는 반가울 수밖에 없다. 낯선 도시를 친근하게 바꿔준 것은 삿포로역 근처 백화점 `에스타`의 엘리베이터 안내원이었다. 백발을 빗어 넘긴 노신사는 내가 일본어를 못 알아듣자 영어로 층별 안내를 해줬고, 내릴 때 허리를 숙이며 배웅의 말을 건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미소 지었고, 그 미소는 일본의 첫 인상이 되었다.

눈보라 맞으며 걷기 힘들어 택시를 몇 번 탔는데 가까운 거리라도 친절하게 운행해줬다. 스노타이어와 체인이 장착돼 있어 거침없이 달렸다. 친절한 서비스 정신과 함께 사고에 미리 대비하는 철저한 준비성까지 보았다. 외국인 여행자라고 해서 가까운 거리를 괜히 돌아가는 짓 따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감이 저절로 들었다. 신뢰의 여부는 태도가 결정하기 마련인데, 내가 탄 택시들은 모두 한결 같았다. 연말연시나 악천후에 택시 잡기란 하늘의 별따기, 장거리 승객만 태우는 돼먹지 못한 승차거부가 만연한 서울 밤거리를 떠올리자 슬퍼졌다.

흰 운동화를 신고 삿포로와 오타루의 눈길을 푹푹 발이 빠져가며 걸었다. 그런데도 운동화가 새것처럼 하얬다. 4박5일 동안 쓰레기를 단 한 번 보았다. 그것도 투명한 비닐쪼가리였다. 음식점, 선술집, 지하철 어디서도 시끄럽게 떠들거나 공공질서를 훼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친절하고, 조용하고, 깨끗하고, 맛있고, 아름답고, 바르다. 문화사대주의가 아니다. 여행에서 감동 받는 순간은 일상에서의 결핍이 충족되거나 혐오하던 풍경들과 대비되는 양상을 볼 때다. 내가 사는 동네는 산기슭인데 주말마다 만취한 등산객들이 고성방가와 노상방뇨하는 추태를 본다. 모텔과 술집이 밀집해 있어 밤낮 시끄럽다. 음식점에서 몰상식한 이들은 큰 소리로 욕설을 섞어가며 대화하고, `술자리 게임`이라든가 `건배 제의`로 소음 테러를 가한다. 그 꼴 보지 않으며 북해도의 미식과 맑은 술을 즐기니 수명이 느는 기분이었다.

일본에 대한 생각이 새로워졌다. 좋은 여행이었다. 여행 이전과 이후는 뭐라도 달라야 한다. 불호가 호감으로, 편견이 앎에의 호기심으로 바뀌면서 책을 몇 권 주문했다. 지금 이 글은 피상적 인상 묘사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 단순한 인상들을 통해 일본과 악수하게 되었다. 어느 지역의 문화를 사랑하는 것은, 여행하는 것은 과거사나 정치와는 별개의 문제여야 한다.

여행객에게는 그가 여행한 지역이 곧 그 나라 전체다. 평창이 지금처럼 해서는 곤란하다. 벽지 누렇게 뜨고 바닥에 곰팡이 핀 민박집이 하룻밤 수십만원, 펜션은 100만원을 호가한다. 그 돈이면 나는 태평양과 마주보며 노천온천을 즐길 수 있는 노보리베츠의 료칸 리조트에 가 며칠 쉬다 오겠다. 이번에 체크아웃하면서 지배인에게 내 시집을 선물했는데 속지에다 이렇게 써줬다. “Here is paradise. Thanks for your kindness!“ 천국을 만드는 것은 결국 친절과 예의다.